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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09. 2023

충청남도 여행기 下

난 김구보다 윤봉길 의사가 훨씬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충남은 물이 좋은가 보다.

어린 시절 홍성 관사에서 살 때 물이 지하수였다. 찬물을 틀면 여름에 시원했고 겨울엔 손이 꽁꽁 얼 정도였다. 그때부터 겨울에는 손을 잘 씻지 않는 나쁜 습관이 들었다. (엄마가 온수물은 겨울에도 잘 틀어주지 않았다)


홍성에서 살다가 타 지역으로 이사를 온 후 피부로 느꼈던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공기가 탁하고 물맛이 별로이며 심지어 물이 거칠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곳 예산에 오니 옛날 홍성에서 목욕을 하던 기억이 났다. 마침 예산 숙소는 100% 온천물이 나오는 곳이었고 (냉 온수 전부 100% 온천수였다) 심지어 욕조는 월풀이었다.


스파를 할 때 월풀이냐 아니냐의 차이도 엄청나다.

1년 넘게 디톡스를 하고 있는 나는 출장을 가서도 무조건 욕조가 있는 객실을 선택하며 아무리 바빠도 스파를 꼭 한다. 입출력의 원칙에 따라 노폐물을 빼고 (안 좋은 음식을 먹은 것 포함) 좋은 제품을 바르거나 음식을 섭취해서 채워주는 걸 1년 넘게 해오고 있다.


전날 밤 스위스유스트 스파 제품을 듬뿍 넣고 월풀을 가동하여 1시간 30분 스파를 한 효과는 엄청났다.

저녁 9시에 침대에 누워서 미동도 없이 자다가 다음 날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양치질을 한 후에 나는 또 욕조에 물을 받아서 월풀 가동 후 2시간 스파를 시작했다.


오늘은 오렌지 오일까지 넣어서 스파를 시작한다. 2인 욕조인데 우쨔 나 혼자 들어가도 꽉 차더라


2시간 스파를 한 후 거봉과 복숭아로 배를 채우고 나서 예산 관광을 시작했다.

모텔 바로 앞에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길래 수덕사를 가기 전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먼저 들렀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갔던 곳인데 많은 사람들이 윤봉길의사기념관을 방문하고 있었다.

윤봉길의사 묘는 효창공원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예산에 산다면 기념관 주위를 산책해도 좋을 듯하다. 완연한 가을이라서 하늘이 정말 청명했다


윤봉길 의사는 예산 출신이셨다.

16세에 결혼하신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25세에 총살을 당하셨다. 학교 졸업한 지 오래돼서 윤봉길 의사를 떠올리면 딱 이 정도만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 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농촌계몽운동도 앞장서서 문맹 퇴치에 노력하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맹인 사람이 아버지의 묘를 찾지 못해 공동묘지에서 모든 묘비를 뽑아와서 아버지 묘비를 윤봉길 의사에게 읽어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알게 되었다. 


기념관 안에는 윤봉길 의사의 유품과 전시물들이 많으니 예산에 왔다면 꼭 들러 보는 것을 추천한다.

 

윤봉길 의사의 친필도 볼 수 있다. 귀한 자료들이 예산에 이렇게 남아 있었다


독립투사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력서는 돈 많이 주는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수십 장 써 본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이틀 전에 김구한테 이력서를 냈다. 이력서를 쓰면서 얼마나 떨리고 심경이 복잡했을까? 당시 윤봉길 의사는 자식도 두 명이나 있었다.


비록 복제품이긴 했지만 윤봉길 의사의 이력서를 보면서 영화 암살도 떠올랐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2일 전 김구한테 남긴 이력서와 수첩이다


이번에는 정말 예산에서만 보기 아까울 정도의 귀한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가 순국할 때까지 사용하던 손수건과 도장 그리고 지갑과 중국화폐이다. 이 물건들을 일본 정부에서 보내왔다는 것도 신기했다


윤봉길 의사가 총살당할 때 매달려 있었던 형틀도 볼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 흑백사진으로 보던 것을 기념관에서 실제로 보게 될 줄 몰랐다. 이걸 예산까지 가지고 왔다는 거 자체도 대단했다. 형틀 한 개가 더 있었는데 그건 없어졌다고 한다.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하시는 동안 이 형틀 위에서 얼마나 힘들고 괴로우셨을까


기념관 옆에는 윤봉길 의사의 처였던 배용순 여사의 묘가 있다.

85세까지 서울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기념관에 들르지 않았다면 윤봉길 의사가 결혼한 것도 몰랐을 뻔했다. 묘 앞에서 사진도 찍었지만 내 얼굴이 나온 관계로 사진은 올리지 않겠다.


다음으로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는 홍성살 때 버스를 타고 자주 놀러 갔던 곳이다.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거의 기억이 나진 않고 대웅전의 느낌이 상당히 편안했다는 기억뿐이다. 아빠는 내가 대웅전에 가면 꼭 한 구석에 무릎 꿇고 앉아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게 신기했다고 한다. 내가 비록 종교는 없지만 희한하게 수덕사 대웅전의 부처님은 아직까지도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셨다.


수덕사 대웅전 안은 사진 촬영이 금지라서 온화한 부처님의 사진은 없다.

대신 어린 Sorita가 대웅전에 방문할 때마다 앉아있었던 자리는 사진을 찍어 왔다.


그때 그 마룻바닥 그대로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수덕사는 무료이니 예산에 오면 꼭 한 번은 둘러봐야 한다


추석 연휴라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스님들이나 다닐 법한 구석진 길을 골라서 내려왔다.

엄청 더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가을 햇살에 하늘이 참 맑더라.


오랜 세월 굳건히 절을 지키고 있는 돌과 돌이끼들을 바라보는 것도 힐링이었다


그 와중에 5백 원도 발견했다. 물욕을 버려야 하건만 백 원짜리가 아니라 오백 원이 놓여있으니 살짝 욕심이 생기네?


쥐꼬리만 한 월급에 (그 당시 아빠 직업은 월급이 정말 적었다.) 지금은 연금의 혜택을 많이 받고 계시지만 그때 젊었던 아빠랑 엄마는 참 힘들었다. 특히 엄마의 힘듦이 더 컸던 듯하다.


그래도 젊어서 잘 살다가 노후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지금 부모님은 서울에서 빚 없이 잘 살고 계신다. 지금까지 할부나 대출 한번 없이 다소 미련하지만 '분수에 맞게' 꾸준히 살아온 두 분 덕분에 지금의 나도 이 위치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성에서 살던 쪼꼬미 Sorita는 몇십 년 후 지금의 내 모습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관사의 틈바구니 안에서 가출하고 싶어도 갈 곳 없던 나는 현재 해외를 누비며 돈을 벌고 있다. 이것 또한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없는 생활비를 조금씩 모아서 세계여행책자를 사서 보여준 덕분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짧지만 정말 알찼던 1박 2일의 충청남도 여행기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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