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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리 Sep 10. 2019

내가.. 내가 대상포진이라니!!

feat. 서른 살

2005년, 형이 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상포진에 걸렸고, 국군 수도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게 뭔지 잘 몰랐고, 대상포진도 군대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같았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놀란 어머니를 진정시키며 병문안 일정을 잡았다.






병문안을 가는 날. 아침부터 집안이 분주했다. 


어머니는 동네 하나로마트에서 미리 사놓은 횟감으로 초밥을 만들고 계셨고, 방에서 나온 날 보고는 "음식 만드는 소리에 깼지?"라며 웃으셨다. 2구짜리 가스레인지 위에는 소고기 뭇국과 돼지갈비찜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고, 김치나 멸치볶음 같은 집 반찬들과 제철 과일들은 벌써 도시락통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돼지갈비찜과 소고기 뭇국의 맛을 보시고 다 되었다는 듯 불을 끄고, 가는 동안 식지 않도록 보온도시락통에 조심 옮겨 담으셨다. 예쁘게 만든 초밥도 보온도시락통에 담으시려는 어머니에게 "초밥은 원래 차게 먹는 것 아니냐."라고 묻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밥은 따뜻하게 먹여야지"






밖에서는 아버지가 세차를 하고 계셨다.


10년을 넘게 탔지만 여전히 애지중지하시는 '무쏘'. 앞뒷좌석의 바닥시트를 모두 드러내고 청소를 하시는 걸 보니, 어디 멀리 나가는 게 분명했다. 주말이나 휴가철에 가족과 어딜 갈 때면 아버지는 늘 그렇게 대청소를 하셨다. 빨랫줄에 널어놓았던 바닥시트를 털어 제자리에 넣으시고, 수건으로 '무쏘' 남은 물기도 구석구석 닦아 내셨다. 마지막으로 앞좌석 한편에 검은 비닐봉지를 매다는 걸로 청소를 마무리하신다. 운전을 하는 동안 졸린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입에 넣어주실 초콜릿이나 사탕의 껍데기를 담을 봉지이다.


어릴 적에도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도착한 병실 침대에 형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몇 개월 전에 입대할 때보다 얼굴이 조금 그을린 것을 빼면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머니 눈엔 그렇지 않았는지,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며 걱정스럽게 보셨다. 하긴 살이 포동포동 쪄가는 요즘 내게도 집에 내려갈 때마다 '살 빠졌냐'라고 하시는 걸 보면, 그건 살이 쪘건 빠졌건 객지 생활하는 아들에 대한 엄마의 걱정 어린 안부 인사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조금 말라 보이는 형은 초밥과 돼지갈비찜, 소고기 뭇국과 반찬들을 단숨에 먹어치웠다. 입이 짧은 사람인데 그렇게 먹는 걸 보니 조금 딱해 보였다. 다만, 맛있게 먹으면서도 아프다는 듯 가끔씩 인상을 찌푸렸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도 같이 인상을 찌푸리셨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냐."라고 묻자, 형은 "조금 아프다."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배고프면 배고프다거나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속 시원히 말한 적 없는 형인걸 알기에 '엄청 많이 아픈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아무렴, 나보다 형을 더 잘 아는 어머니는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가지고 간 음식을 다 먹고 과일만 더러 남았다.


대상포진 부위를 보는 말에 형이 옷을 걷어 보였다. 배꼽 바로 오른쪽에서 시작해 등 뒤까지 크고 작은 수포들이 두꺼운 띠를 이루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혐짤을 본 것 마냥 징그러운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징그러울 때 나오는 표정과 안쓰러울 때 나오는 표정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 보니 온 마음으로 안쓰러워하는 표정은 분명히 다른 듯했다.


어떻게 아프냐는 말에 형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포가 있는 곳이 아니라 온 몸의 신경이 날이 선 듯해서 가만히 있어도, 살짝만 스쳐도 아프다고 했다. 근데 그 아픈 곳이 살갗인지 뼈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형의 설명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설명을 하는 중간중간에도 형의 일그러지는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13년이 지났다.


작년 12월, 입사한 회사에서 슬슬 스트레스심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언젠가부터 좋지 않은 컨디션과 감기몸살에 걸린 듯 온몸이 욱신거려 감기약을 몇 번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무릎이 아팠는데, 아무리 평소에 운동을 안 했을지언정 서른 살에 무릎이 아플 은 아니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몸에, 지난밤에 없었던 무언가가 생겨 있었다. 위치는 배꼽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언뜻 보아도 굉장히 불쾌한 형태였다. 안경을 쓰고 자세히 들여다보자마자 그것이 대상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3년 전에 형의 배에서 봤던 그 징그러운 수포가 올라온 것이다.


"아, 젠장."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에게 대상포진임을 확진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사가 젊은 사람들은 수포가 올라와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바로 알아봤냐며 빨리 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요즘은 얼굴도 보기 힘든 형이 새삼 고마웠다.






수포는 점점 늘어 허리 왼쪽으로 두꺼운 띠를 둘렀다. 통증도 함께 심해졌는데, 가만히 있어도 아픈데 스치면 더 아프고 그렇다고 만지면 소스라치게 아팠다.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건지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형이 왜 그렇게 설명을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얼마 후, 회사에 대상포진이 걸렸음을 알렸지만 그 누구도 병가를 내라는 말 하지 않았다. 가끔씩 '괜찮냐'는 말과 회식 자리에서는 '아직도 대상포진 핑계로 술  마시냐'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어차피 때려치울 거, 병가라도 받아냈어야 했다.






내가 대상포진에 걸리는 바람에 가장 고생한 건 당시 여자 친구이자, 지금의 와이프였다.


본인도 회사를 다니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주는데 1시간은 족히 걸리는 일을 군소리 없이 해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픈 마당에 같이 어디 놀러 갈 수도 없었고, 자극적이기에 맛있는 음식이나 그 흔한 퇴근 후 맥주 한 잔도 함께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주를 고생하고서 함께 먹는 치맥은 정말 환상이었다.


'역시 치맥은 대상포진 후에 먹는 치맥이지.'라며.






어머니에게 다 낫고서야 그 사실을 알렸다.


'살은 안 빠졌냐'는 물음을 시작으로 질문 폭탄이 이어졌다. 어디에 어떻게 났는지. 얼마나 아지. 음식은 잘 먹는지. 약은 잘 챙겨 먹는지. 회사는 계 나가는지. 사람이 아픈데 병가도 안 내준다며 회사 욕을 한참 하시다가, 간호를 해준 지금 와이프 얘기를 듣고는 그 지극정성에 그렇게 고마워하셨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나 싶다가도, 말씀드려봐야 괜히 걱정하실 것을 되려 걱정하여 말 안 했을 아들 마음조차 이미 알고 계실 어머니이기에, 웃음과 농담으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얼마  부모님 에 갔을 때, 예상대로, 어머니는 대상포진으로 살이 빠졌을 나를 위해 만찬을 준비하셨고, 나는 그걸 맛있게 먹어치웠다.


13년 전에 형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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