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리 Aug 14. 2019

자네 어느 학교 출신인가?

'일단 합격자' 축하 회식

<블라인드 채용>
입사지원서나 면접 등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출신 지역이나 신체 조건, 가족관계, 학력 등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정보를 요구하지 않고 대신 직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등을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채용 방식이다. 정부는 2019년...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일 년의 취준생 끝에 받은 합격 통보.

첫 회식 자리는 돼지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했다.


"자, 여러분들 '일단 합격'한 것을 축하합니다. 근데! 최종 발표 과제  남은 거 알죠? 거기서 한두 명은 떨어지니까 아직 최종 합격은 아닌 거야~. 다 같이 위하여! (위하여!)"


사실 목표로 하던 기업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취업 준비로 일 년이 되어갈 무렵,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드디어 필기시험 당일, 시간 내에 풀지 못 깨끗한 NCS 시험지와 멍 해진 머리로 휘갈겨 더러워진 논술 시험지를 제출했다. '아, 글렀구나...'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답답함 들이켰다. 노트북을 열고 다른 채용 공고를 살폈다. 여긴 뭐. 생소한 기업, 생소한 분야, '오늘 지원 마감'. 서둘러 지원서를 보냈. 그리곤 서류와 필기, 면접에 덜컥 붙어버렸다. 말 그대로 덜컥, '채용형 인턴'이 되었다. 





첫 회식 자리에 모인 25명. 두 달 뒤 최종 발표 과제를 앞둔 채용형 인턴, '일단 합격자'들이었다.


"여러분, 주목! 아까 다른 간부님이 한두 명 떨어진다고 했는데, 이거 진짜야 진짜! 두 달 동안 각자 부서에서 잘 배우고, 많이 물어보고, 긴장해야 된다! 자, 저기 OO  씨? OO 씨가 여기 무기직 출신이잖아! 건배사 한 번 해봐요"


이 기업 경험이 있는 OO 씨 패기 있고 노련 건배사를 선보였다. 나머지는 각자 준비해 온 건배사를 되뇌며 지목당하지 않기를 혹은 당하기를 바라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간 건배사들에 온갖 평가와 박수, 야유가 지나갔다.


고비를 넘긴 '일단 합격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빈 반찬을 채우고 빈 술병을 치우고,  돼지고기 잘 익도록 뒤집 또 뒤집었다.





옆에 앉아있던 간부가 내게 물었다.

"자네 어느 학교 출신인가?"

"네?"

"이쪽 전공인가?"

"아니요, 다른 쪽 아니, 공학계열입니다."

"전혀 다른 전공이네? 흠, 그래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그 간부는 흥미 없다는 듯 합격자에게 었다.

"자넨 어느 학교 출신인가?"

"저 A대학교 나왔습니다"

"아! 그래? 그럼 이쪽 전공이겠구먼? 이야~ 그 누구야, 그 OOO 교수님 잘 계시는가?"


두 번의 이전 직장에 동기를 제외하 내게 출신 대학 묻는 사람은 없었. 일종의 매너랄까. 런데 쪽에선  회식 자리에서도 이후 다른 회식 자리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출신 대학 물음이 이어졌다.


'블라인드 채용이라더니, 채용 후에는 이렇게 물어봐도 되는 건가? 아니, 아직 최종 발표가 남았는데?'





또 다른 간부가 다가왔다.

"자, 한 잔 받게."

"(술잔을 내밀며) 네, 오지리입니다."

"아니, 이 술잔을 받아야지."

"네?"

"술잔 돌리는 거 안 해봤구먼? 내가 술잔에 한 잔 따라주면 자네가 받아 마시고, 자, 이렇게 휴지로 쓱쓱 닦아서 다시 나한테 주고 자네가 한 잔 따르는 거야."

"아, 네... 처음 해봤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안 하려고들 하는데, 이건 사실 신입들이 간부들한테 먼저 인사드리면서 쭉 돌리는 게 맞아. 그게 예의지."

"네, 알겠습니다."


'아, 뭔가 더러운데, 돌린 술잔이 더러운 건지, 기분이 더러운 건지 모르겠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몇 명 이미 술잔을 돌리고 있었고,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몇 명은 나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나도 간부 몇에게 술잔을 돌렸다.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출신 대학과 전공, 시시콜콜한 질문 따위를 했고 당황하거나 혹은 흥미로워했다. 어느새 25명이 네댓 명 간부에게 술잔을 돌리기 위해 그 좁은 방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몇 테이블 건너 다른 간부와 앉아 있 '일단 합격자' 한 명과 눈 마주쳤다. 우리는 눈썹과 눈동자를 열심히 굴러가며 표정으로 화를 나눴다.

'이 간부한테 술잔 돌렸어요?'

'직요, 이 간부는요?'

'아직요, 그럼  저랑 자리 바꿔요.'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술잔 술병 하나, 휴지 한 장과 억지미소를 들고 일어섰다.




'그 날 철판에 뒤집히며 구워지던 것이 과연 돼지고기뿐이었을까. 나는 아니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