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리 Aug 15. 2019

재미로 그런 건데 왜 그렇게 심각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배정받은 부서에 협조 요청 공문이 도착했다. '신입직원 대상 대전 OOO센터 견학 협조 요청'


"실장님, 인사실에서 온 공문입니다. 내일 대전 OOO센터 견학 일정이 있다고 하는데,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꼭 공문을 이렇게 닥쳐서 보낸다니까. 그래 뭐, 갔다 와."


다음 날 아침, 본사 앞 전세버스에 올랐다. 맨 앞자리에 앉은 인사 담당자 뒤로 밝은 표정의 동기들이 보였다. 군데군데 모여 저마다 며칠 안 된 회사생활의 고충이나 미담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친구부터 나 같은 30대 중고 신입까지. 최종 발표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채용형 인턴이지만, 그런 건 되도록이면 떠올리지 않으려 연신 이야기 꽃을 피웠다. 꽉 막힌 강변북로 옆으로 핀 5월의 꽃들이 창문 밖으로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센터에 도착했다. 여느 회사에나 있을 법한 강의실로 우리를 안내하며, 센터장이 부재한 관계로 실장이 소개를 대신한다고 했다. 맨 앞 줄부터 채워 앉으라는 말에 괜히 서성거리다 맨 뒷 줄에 앉았다. 젊은 직원이 능숙하게 강의실의 조도를 조절하고 스크린을 내렸다. 빔프로젝터가 예열을 마치고 첫 슬라이드를 희미하게 띄우기 시작했다. 딱 봐도 날짜와 장소만 그때그때 수정해서 쓰는 것 같은 피피티. 실장 치고는 젊어 보이는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작은 키에 큰 목소리, 능글맞아 보이는 눈매. 오랫동안 같은 피피티로 같은 주제를 발표해 온 듯 짧지만 능숙했다. 뻔한 질의응답이 끝나고, 마무리 인사와 박수가 이어졌다.

   

"자, 이제 신입직원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자기소개를 합시다. 정해진 건 없고 본인 이름을 재미있게 소개하면 돼. 나랑 센터 직원들이 듣고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한테 상품을 줄게. 맨 앞에서부터 시작합시다."


(웅성웅성) '갑자기?'  






"다들 하기 싫은가? 왜~ 재밌잖아!"


맨 앞에 앉았던 동기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갔다. 실장의 칼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길게 할 필요 없고, 본인 이름을! 우리가 기억하게끔! 재미있게 해야 됩니다. 자, 시작!"


그렇게 한 명씩 자기소개 아니, 이름소개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밝을 명에 빼어날 수를 써서 명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에 밝고..."


"제 이름은 할머니가 지어주셨는데요, 평소 좋아하시던 꽃 이름에서 따오셨습니다. 그런데..."


"제 이름으로 삼행시를 해보겠습니다! 다 같이 운을 띄어주시겠습니까!? 이! 이 세상에 태어나!"

.

.

.





첫 회식에선 건배사가 돌아가더니, 이제는 이름소개가 돌아갔다. 한 명 한 명 끝날 때마다 웃음과 실소가 섞여 나왔다. 갑작스러운 주문에도 이름에 대한 한자 뜻풀이며 얽힌 에피소드, 재치 있는 율동이나 삼행시까지 선보이는 동기들을 보고 있자니 대단하면서도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누구에게는 하룻밤 이불킥 거리로, 또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수치심일 수 있는 그 순간들을 참아내려 애쓰는 모습에 울컥했다.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이 불편한 마음의 소리를 분출할 용기는 없었지만 적어도 실장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 않았다.


"안녕하세요. 다들 배고프실 텐데, 짧게 하겠습니다. 오지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약간 싸해진 공기를 가르며 자리에 앉자, 실장이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리더니 팔짱을 풀 걸어 나왔다.


"어때, 다들 재밌었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2018년 12월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명시된 내용으로,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2019년 7월 16일부터 시행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군 복무 시절이 생각난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계급이 마치 벼슬인 양 굴어대던 못된 상 병장들. 새로 들어온 이등병에게 곤란한 질문을 해놓고는, 실제로 곤란해하는 것을 보고 깔깔대며 웃어대던 모습.


막사 대신 현대식 고층 빌딩에서 중간한 존댓말 쓰며 세금으로 만든 물을 선심 쓰듯 내걸었을 뿐, 고작 채용형 인턴에게 관계 우위를 이용해 업무와 관계없는 경쟁을 붙였다. 창피해하면서도 군소리 없이 할 것을 알았고, 실제로 창피해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하는 모습 군 복무 시절의 못된 상 병장들과 닮았다.


'신입직원은 다 그런 거라고. 선배들도 다 그랬다고. 요즘 애들이 정신력이 약한 거라고.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들러붙을 뻔한 훈수들에 마음이 더 불편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네 어느 학교 출신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