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채용> 입사지원서나 면접 등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출신 지역이나 신체 조건, 가족관계, 학력 등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정보를 요구하지 않고 대신 직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등을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채용 방식이다. 정부는 2019년...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일 년의 취준생 끝에 받은 합격 통보.
첫 회식 자리는 돼지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했다.
"자, 여러분들 '일단 합격'한 것을 축하합니다. 근데! 최종 발표 과제 남은 거 알죠? 거기서 한두 명은 떨어지니까 아직 최종 합격은 아닌 거야~. 다 같이 위하여! (위하여!)"
사실 목표로 하던 기업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취업 준비로 일 년이 되어갈 무렵,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드디어 필기시험 당일, 시간 내에 풀지 못해 깨끗한NCS 시험지와 멍 해진 머리로 휘갈겨 더러워진 논술 시험지를 제출했다. '아, 글렀구나...'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답답함을 들이켰다. 노트북을 열고 다른 채용 공고를 살폈다. 여긴 뭐지.생소한 기업, 생소한 분야, '오늘 지원 마감'. 서둘러 지원서를 보냈다. 그리곤 서류와 필기, 면접에 덜컥 붙어버렸다. 말 그대로 덜컥, '채용형 인턴'이 되었다.
첫 회식 자리에 모인 25명. 두 달 뒤 최종 발표 과제를 앞둔 채용형 인턴, '일단 합격자'들이었다.
"여러분, 주목! 아까 다른 간부님이 한두 명 떨어진다고 했는데, 이거 진짜야 진짜! 두 달 동안 각자 부서에서 잘 배우고, 많이 물어보고, 긴장해야 된다! 자, 저기 OO 씨? OO 씨가 여기 무기직 출신이잖아! 건배사 한 번 해봐요"
이 기업 경험이 있는 OO 씨가 패기 있고 노련한 건배사를 선보였다. 나머지는각자 준비해 온 건배사를 되뇌며 지목당하지 않기를 혹은 지목당하기를 바라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간 건배사들에 온갖 평가와 박수, 야유가 지나갔다.
한 고비를 넘긴 '일단 합격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빈 반찬을 채우고빈 술병을 치우고, 돼지고기가 잘 익도록 뒤집고 또 뒤집었다.
옆에 앉아있던 간부가 내게 물었다.
"자네 어느 학교 출신인가?"
"네?"
"이쪽 전공인가?"
"아니요, 다른 쪽 아니, 공학계열입니다."
"전혀 다른 전공이네? 흠, 그래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그 간부는 흥미 없다는 듯 다른 합격자에게 물었다.
"자넨 어느 학교 출신인가?"
"저 A대학교 나왔습니다"
"아! 그래? 그럼 이쪽 전공이겠구먼? 이야~ 그누구야, 그 OOO 교수님 잘 계시는가?"
두 번의 이전 직장에서는 동기를 제외하고내게 출신 대학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일종의 매너랄까. 그런데 이쪽에선 첫 회식 자리에서도 이후 다른 회식자리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출신 대학 물음이 이어졌다.
'블라인드 채용이라더니, 채용 후에는 이렇게 물어봐도 되는 건가? 아니, 아직 최종 발표가 남았는데?'
또 다른 간부가 다가왔다.
"자, 한 잔 받게."
"(술잔을 내밀며) 네, 오지리입니다."
"아니, 이 술잔을 받아야지."
"네?"
"술잔 돌리는 거 안 해봤구먼? 내가 술잔에 한 잔 따라주면 자네가 받아 마시고, 자, 이렇게 휴지로 쓱쓱 닦아서 다시 나한테 주고 자네가 한 잔 따르는 거야."
"아, 네... 처음 해봤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안 하려고들 하는데, 이건 사실 신입들이 간부들한테 먼저 인사드리면서 쭉 돌리는 게 맞아. 그게 예의지."
"네, 알겠습니다."
'아, 뭔가 더러운데, 돌린 술잔이 더러운 건지, 기분이 더러운 건지 모르겠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몇 명은 이미 술잔을 돌리고 있었고,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몇 명은 나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나도 간부 몇에게 술잔을 돌렸다.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출신 대학과 전공, 시시콜콜한 질문 따위를 했고 당황하거나 혹은 흥미로워했다. 어느새 25명이 네댓 명 간부에게 술잔을 돌리기 위해 그 좁은 방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몇 테이블 건너 다른 간부와 앉아 있던'일단 합격자'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눈썹과 눈동자를 열심히 굴러가며 표정으로대화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