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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Apr 15. 2022

시절인연 (時節因緣)

밤 산책 후에 쓰여진 일기

이부자리에 누워 내 손을 꼭 잡고서 잘 왔다며 되뇌시던 할아버지의 작은 음성 그리고 기억 속에 퍼지는 메아리. 그런 기억의 잔상은 망각의 수순에 따라 흐려지기는커녕 짙어지기도 했다. 같은 자리를 공전하는 별과 같은 기억이었다.


사라지는 듯하더니 다시 되돌아오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한때는 소중했었고, 또 한때는 괴로움이 되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시절이니까 더 마음이 편치 않았는 모양이다.


그래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주고받았던 마음들을 지나간 것이라고 굳이 잔재처럼 버려두고 싶진 않다. 지나간 인연들도 지금의 내가 있게끔 해준 이들이니까 감사하다고 말하면 너무 속 편한 사람일까.


망각은 인간의 축복이라던 일 년 전의 꿈이 생각난다.  그땐 아니라고 살아가며 기억하고 싶은 게 많다고 부정했지만, 이제는 잊혀야 할 기억도 있고 간직하고 싶은 추억의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축복 같은 망각과 망각을 거스르는 기록을 적절히 조절하며 내일로 걸어가고 싶다.


내일로 걸어가다 문득 겁이 날 땐, 잊고 싶지 않은 과거는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 기억의 섬에서 나를 기다려 주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래서 내일로 흘러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가지고 가고 싶은 소중한 기억들은 손에 쥐고, 잊고 싶은 기억들은 망각의 무덤에 묻어두고서 홀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그리고 어제가 소중했듯 오늘도 소중하기에 해가 뜨는 아침에는 지는 황혼 같은 마음을 떠올리기 보다 내게 주어진 하루를 원 없이 살아가야지.


이러한 배움들로 인해 ‘내게 머물렀던 존재들은 떠난다.’라는 과거에 쓰인 잘못된 문장은 수정된다. ‘나 또한 영원하지 않다. 언젠간 이 세상을 떠난다.’라는 말이 더해진다.


우리는 세상에 잠시 여행 온 여행자들인 것이다. 만남과 이별은 필연이라는 것. 그건 나 자신과도 마찬가지다.


시절은 그런 것이다.

머물 사람은 머물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는 것.


그러니 인연을 기꺼이 사랑을 가득 담아 맞이하고, 가는 길 따뜻한 안녕을 담아 보내줘야지.

사람은 보내도 추억은 남는다.


이런 배움들이 남은 걸 보면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진 않았나 보다. 다 겪어내야 할 감정들이고 시간들이었음을 궤적이 쌓인 후에야 알 수 있었기에, 시간이 흐른 뒤 홀가분함을 느낀다. 이를 알려준 기록의 시간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한때라는 말도, 한 철이라는 말도 순간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찰나만큼은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라는 것. 영원을 상상하게 해준 그때 그 마음과 잠시 머물러준 존재들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잊지 않았던 마음들에게 종종 안부를 건네며 걸어가야지.


2022.4.9

더할 나위 없이 안온했던 밤 산책 후,

써내려간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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