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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씨 Mar 30. 2022

채용 취소했던 그 회사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못했습니다.


 2년이 넘은 일이다.


어느 가을, 나는 주니어 노무사로 노무법인에서 일을 하다 여러 생각 끝에 퇴사를 결정했다.

기업 입사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신입으로 들어가기엔 나이가 적지 않고, 경력으로 들어가기엔 이력이 충분하지 않아 고군분투 중이었다.


하루는 대형 쇼핑몰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헤드헌터 김ㅇㅇ입니다. 사이트에서 이력서를 보고 연락드려요.”


그 헤드헌터는 글로벌 스포츠 의류회사의 한국지사(편의상 K 사라고 하자) 인사부 내 한 직무에 지원해달라고 하였다. 참고로 K사는 유치원생도 알만한 유명한 회사다.


헤드헌터는 K사의 구인 직무에 내 경력이 잘 맞는다며 , 면접만 잘 진행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소비재 회사인 만큼 K사 제품에 친숙하다는 점도 강조해달라고 했다.

1년 계약직이지만 중요한 직무라 정규직 전환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하긴, 외국계 기업은 보통 계약직 기간을 거쳐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지원해볼까.’


그 길로 나는 서점을 나와서 해당 브랜드의 매장으로 향했고 그 브랜드의 옷을 마련했다.

서류전형 통과 후, 나는 부적처럼 마련한 그 옷을 입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인사부 부서장과 인사부 직원 2명, 총 3명이 면접관으로 들어왔다. 왜인지 모르게 그날따라 자신감이 있었고 면접은 매우 순조로웠다.


며칠 뒤, 헤드헌터가 나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연봉 협의가 필요하니  다음날 아침까지 전 직장의 급여명세서와 원천징수 영수증 등 급여 증빙자료를 달라고 했다.


정말 기뻤다.


급한 요청에 서류를 부랴부랴 준비하여 제출했다.


이후, 면접에서 봤던 K사의 채용 담당자가 내게 전화로 입사를 축하한다고 했다.


그녀는 전 직장에서의 내 연봉을 고려하여 책정된 기본 연봉과 복지 등을 포함, 총연봉이 얼마인지 알려주었고 나는 기쁘게 수락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입사일은 잠정으로 X월 X일 즈음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날짜는 다시 연락을 준다고 했다.


헤드헌터는 입사 축하 겸 식사를 제안했다.

행복하게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헤드헌터는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즐거웠어요^^ 근무 잘하시고요!


나는 잠정 입사일이 되기 전에 잠시 혼자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제주도 여행이 끝나가도록 그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서울로 돌아와서 그 채용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별안간 나에게 갑자기 2차 면접이 생겼다고 했다.


‘구두로 입사를 제안하고, 승낙까지 했고, 구체적인 근로조건까지 정했는데, 이건 근로계약이 성립된 거 아닌가. 이걸 깨고 2차 면접을 본다고?’


정말 당황스럽고 속이 상했다. 그 채용담당자는 자기는 어쩔 수가 없다며 한국지사가 속한 아시아 태평양 지부의 담당자가 꼭 내 면접을 보고 싶다고 했단다. 길 건너 남 얘기처럼 그녀는 “면접 잘 보세요!”라고 말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고, 거기서 따졌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그저 열심히 2차 면접을 준비했다. 싱가포르에 있는 K사 직원과의  영어 면접이었다.  두 명의 면접관과 거의 1시간가량 비대면 면접을 봤다. 그 면접이 끝나고 너무 힘들어서 바로 누워서 내내 잤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채용담당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참 뒤에 헤드헌터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미안해요. 사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미안하네요…”

내가 2차 면접에서 떨어져서 채용은 어렵게 됐다는 거다.

헤드헌터는 근로조건과 입사일까지 거의 맞춰 두고 난 뒤에 이렇게 번복하는 경우를 처음 겪었다며 미안해했다.


할 말을 잃었고 너무 화가 났다.


사실 2차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그 사실보다도

이미 모든 근로조건에 대한 상호 협의가 완료되어서 근로계약의 성립이 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음에도 순순히 2차 면접을 보기로 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또, 채용이 결정된 후 모종의 이유로 헤드헌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처우에 대해 이야기 하기 원했던 그 채용담당자가 (아마도 헤드헌터가 나 대신 연봉을 더 높게 협상할까 봐 염려되었던 것 같다)정작 탈락 소식은 본인이 전하지 않고 헤드헌터에게 전달했다는 사실도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채용을 별안간 취소하고 2차 면접을 본 것에 대해 제대로 항의하지도 못했다.



통상 합격 통보 시점에 근로계약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합격을 취소할 때에는 근로기준법에 따른 해고제한 규정을 적용받는다고 본다. 다만 실제로 근로를 한 것은 아니기에, 엄격한 “해고”의 요건보다는 완화된 “유보된 해약권”을 행사하여 합격 취소를 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채용 합격을 취소를 하기 위해서는 합격의경위, 근로자가 담당할 업무의 내용과 성질 등에 비추어 채용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볼만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하며 사회 통념상 상당한 이유가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채용 취소는 곧 부당해고로 인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서 채용 취소를 했을 때 문제가 될까?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다를 테지만, 최근 하급심 판결에 따르면  헤드헌터를 통해 채용을 진행한 사례에서 회사에서 연봉과 복리후생 조건을 제시하고 희망 입사 시기를 정하여 헤드헌터에게 제안하고, 헤드헌터가 합격 축하 메일과 함께 이러한 조건을 구직자에게 전달하여 구직자가 입사 희망 시기를 헤드헌터를 통해 회사에 전달한 사안에서, 회사가  갑자기 처우를 변경하고 구직자가 받아들이지 않자 채용취소한 것이 부당해고라고 인정된바 있다.

이를 참고하면, 구체적인 근로조건과 입사일에 대한 합의가 되어 채용의 제안과 승낙이 있었음에도 사회통념상 인정될 수 있는 이유가 없이 채용 취소를 했다면 부당해고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쓰라린 기억을 삼키고 구직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던 와중에 정말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루는 전 직장 동료들이 내게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그런데 혹시요…K사 지원했다가 탈락했어요?”


헉, 내 근황을 어떻게 아는 걸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나의 채용이 좌절된 이후 K사가  내 전 직장(노무법인)과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순간 면접장에서 내 전 직장에서 했던 프로젝트를 이야기하자 눈이 반짝이던 면접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근데 그 뒤로 이어진 말이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근데 K사가 파트너십을 맺는 과정에서, OO님이 그 회사 지원했다는 거, 그리고 탈락했다는 거, 그 포지션이 1년 계약직이었던 것까지 다 말했어요. 그걸 왜 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괜찮아요?”


와, 나를 두 번 죽였다.

지원한 사람의 개인정보를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의 몇 곱절은 더 화가 났다.


기업은 채용지원자의 개인정보를 안전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다. 또한 합격 사실은 입사지원자의 사생활 정보이므로 비밀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참고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개인정보 처리자의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인하여 개인정보가 분실ㆍ도난ㆍ유출ㆍ위조ㆍ변조 또는 훼손된 경우로서 정보주체에게 손해가 발생한 때에는 실제 발생한 손해를 초과하여 최대 그 실제 손해액의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할 수 있다.


또다시 100번을 고민했다.

‘K사 채용담당자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이거 해고에 준해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냐, 그 회사 홍보 팀으로 연락을 할까? 어차피 난 이제 고객이잖아.’

‘글로벌 본사는 개인정보에 훨씬 더 민감할 테니, 글로벌 핫라인으로 전화나 이메일로 제보를 할까? 한국지사의 인사부가 구두로 근로계약을 맺어놓고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지원자의 개인정보까지 함부로 누설하고 다닌다고 이야기를 할까?’


명색이 노무사인 나였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하던가.

정작 내 일이 되자 권리를 주장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사건의 부당함에 대해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그래야 나 같은 비슷한 사례가 생기지 않을 것이며 인사부 직원들도 경각심을 가졌을 것이다.

나라도 부당함을 표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좁은 업계에서의 평판이나 인맥과 같은 것들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고 느꼈기에 내가 참고 넘어가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진대, 세상에 얼마나 더 참는 사람들이 많을까. 나라도 참지 말았어야 한다.




2년 사이에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다. 구직자에 대한 회사의 갑질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 사이 나는 어떤 회사의 인사부에 입사하여 일하고 있다.


만일 과거의 나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채용 과정에서의 <채용 취소>나 <개인정보 유출>은 당연히 화를 내어도 되는 일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채용 탈락만 견디기에도 힘든 당신이, 그 외의 부당함까지 견딜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당함을 소리높여 이야기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미워하는 것은 그만하고 싶다.

이따금 회사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누군가 부당함을 느끼는 건 아닌지,

참고 넘어가는 사람이 생기진 않을지 떠올려보게 되는 건 아마도 내가 겪었던 이 화나는 사건 덕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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