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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영 Apr 23. 2022

복사용지 부족해요, 그리고 시간도요

일의 깊이와 시간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주어진 시간이 짧다면 일의 깊이를 포기할 거야?

아니면 일의 깊이를 지키고, 시간을 포기할 거야?”


친구 K가 던진 질문의 배경은 이랬다. 그녀의 남자 친구(그는 나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다)가 최근 이직을 했는데, 이직한 회사에서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한 두 시간 만에 처리해주기를 요청했다는 거다.


그는 적어도 다음날 정도에 처리해도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사가 늦은 오후에 지시한 일을 퇴근 전까지 달라고 해서 적잖이 당황했었다고 한다. 나도 비슷한 종류의 일을 해봤던 터라 듣는 내가 진땀이 날 정도였다(그 일은 집에서 편안히 안경을 끼고 책상다리를 하고 집중해서 진행해도 꼬박 한나절은 들어가는 일이었다.)


어찌어찌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하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 내에 만든 결과물이 스스로 성에 차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내게 그 사건에 대해 얘기해주다가, <일의 깊이와 시간>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이었다. 일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무엇에 중점을 둘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음. 만일 바로 당장 제출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나는 그냥 밤을 새우고 일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했을 거 같아. 만일 다음날 아침까지만이라도 시간이 있었다면 말이야… 일의 깊이를 위해 내 시간을 포기했겠지?” 내가 말했다.


“와, 이게 진짜 사람마다 다른가 봐. 나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 시간에 맞게 일의 깊이를 적당히 조정했을 거 같은데? 그 정도 시간을 줬단 건 애초에 기대치를 낮게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녀의 답변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또 다른 친구 C의 이야기다. 해외취업을 하여 베를린에 살고 있는 내 친구 C는 지금 다니고 있는 독일 회사의 입사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만일 A, B, C라는 일이 당신에게 주어졌는데, 합쳐서 6일이 걸린다고 칩시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5일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성실한 토종 한국인인 내 친구는 “잔업을 해서라도 A, B, C를 끝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사실 내 머릿속에서도 그게 답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면접관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하, 그렇군요. 그것도 방법이죠. 하지만 저희는 당신이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하여 업무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일을 조정하기를 바라요.” 친구는 C는 그 말이 인상 깊었다며 내게 말했다.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도 주지 않고 깊이 있게 일을 할 수는 없다.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개인의 시간을 포기하고 일의 깊이를 채우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우리나라처럼 복닥거리는 초경쟁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해내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요구되는 성과 수준은 높아지기만 한다. 시간은 더 적게 주어진다. 누군가는 해내니까.


나만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의 깊이를 포기하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적어도 내 개인 시간을 포기하면 “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도 죄책감은 덜어지곤 했다.


근데 그게 정말 좋은 걸까? 내 시간을 포기하고 일의 깊이는 지켜야 된다는 압박에 못 이겨 나는 전 직장을 생각보다 빠르게 퇴사하였다. 반면, 친구 K는 벌써 한 회사에서 5년 차를 넘기며 끈기 있게 직장을 다니고 있다. 친구 C는 본인의 커리어에 더 도움이 되는 팀으로 사내 이동도 하였고, 회사와 조율하여 잠시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중이다. 그들은 일의 깊이와 시간을 적절히 조율하는 능력을 길러가고 있는 듯하다.


무작정 해내자는 게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나를 병들게 하고, 동료들에겐 부담을 줄 수도 있다.


시간을 포기하고 일의 깊이를 취하려는 사람은 피곤함을 숨기고, 마치 <업무시간 내에 이 모든 일을 다 해낸 능력자> 같은 말끔한 얼굴하고 앉아 있기도 한다. 아니면 반대로, 나는 <연장 야근 특근까지 모두 했는데 너희들은 뭐 하고 있니>하는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둘 다 오래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거다. 본인이 지쳐 나가떨어지거나, 동료가 자괴감을 느껴 조직을 떠날 수도 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시간을 갈아서 일의 깊이를 추구하더라도 막상 그것이 더 나은 성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머리로는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만 실행은 어렵다. <좋은 결과물을 원하시면 시간을 더 주시든가, 아니면 감당하시든가>와 같은 마인드셋을 가지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고민 끝에 나만의 해결책을 만들었다. 앞으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음에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면 ‘복사용지’를 떠올리기로 했다. 시간도 복사용지도 일에 필요한 자원이다. 복사용지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 망설여지지 않는다. 부족하다면 일단 빨리 필요한 만큼만 복사를 하든가, 복사용지를 채워 넣든가, 옆 팀에서 복사용지를 빌려오든가 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복사용지가 필요하듯,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운을 떼는 것부터가 시작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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