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살아보자. 오늘의 하루는 후회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다시 시작이다. 후회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되돌릴 수는 없으니, 그냥 내가 거꾸로 행동해보는거다. 이제와서 어떻게 행동을 바꿔서 하냐고? 마음속으로 해보자. 심상 요법의 효과는 예상외로 크다.
하루가 저물고 생각이 많아지는 지금은, 밤 11시. 오늘 살아본 하루에 대해 생각한다.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그 시간부터 태엽을 반대로 감아본다.
21:30
아이에게 빨리 잘 준비를 안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내일이 월요일인데 아직 가방도 챙겨놓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온 방안을 파레트, 붓, 물감 튜브로 어질러 놓은 아이에게 짜증 잔뜩 섞인 앙칼진 잔소리를 퍼붓는다. '00아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우리 피곤한데 어서 자자'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얘기해본다.
20:15
저녁 설거지를 너무 격하게 하느라 핸드폰으로 게임만 하고 있던 남편의 손과 눈에 살기를 품었었다. 설거지를 열심히 하지 않는 나로 되돌려 놓는다. 설렁설렁 노래도 흥얼거리고, 넷플릭스로 밀려있던 드라마도 시청한다. 남편이 게임을 하든, 소파에서 코를 골든, 코를 파든 중요치 않다. 손과 눈은 협응대신 각자의 일에 열중한다.
16:00
아 배고파. 아침부터 빨간 국물에 꼬불거리는 각선미 드러내는 면발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위장을 자극했다. 결국 이번주만 벌써 3번째 라면을 끓여먹었다. MSG에 공격당한 피부가 벌겋게 부어올라있다. 간지러워 미칠 것 같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결국 입의 짧은 만족을 위해 내 몸을 공격했다. 염증을 다스려줄 신비한 힘을 가진 노니 주스를 소주잔에 붓고 원 샷. 내 몸은 소중하니까. 라면 대신 사과를 깍아먹는 나를 응원한다. 정히, 라면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면 두 젓가락만 호로록.
13:20
오늘은 정말로 책에 푹 파묻혀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1시간 반 이상 ㅋ톡에 시간을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그것도 엄연히 말하자면 아이의 학교와 관련된 '일'을 처리한, 매우 생산적인 활동이었지만. 그냥 조금 미뤄두어도 되었을, 바로 대응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데 원치 않는 시간을 빼앗긴 기분에 스스로 상심했다. 핸드폰을 서랍 속에 넣어둔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은 스스로 지킨다. 읽고 싶었던 책을 창가의 소파에 앉아 향긋한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즐긴다. 그리고 1시간 후, 묵혀둔 일을 서서히 처리한다. 처리하는데 비슷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즐기고 싶은 그 순간을 지켜낸 것에 잘했다고 얘기해준다.
11:40
평온한 늦은 아침(사실 점심에 가깝지만, 늦게 일어났으니 그냥 아침으로 해둔다). 충분히 잤고, 바깥 날씨도 손색없이 맑다. 겨울이지만 드물게 느껴지는 맑고 따뜻한 기운이다. 후회 없음. 여기서 종료.
그렇게 마음에서 되감아 놓은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본다. 마치 조금은 다르게 하루를 살아낸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