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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윤정 Oct 17. 2021

독일과 중국 사이에서,허젠핑

가장 중국적인 중국의 그래픽디자이너




오늘 소개할 디자이너의 이름은 hesign이라는 스튜디오를 차린 허젠핑입니다.  중국 저장성 푸양 출신으로 중국미술학원 평면 디자인과를 졸업했는데요. 그런데 허젠핑의 이력은 다소 독특합니다. 분명 중국 출신이지만 베를린으로 유학을 가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역사학과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생의 절반을 베를린에서 보냈기 때문에 중국 디자이너라고 불리기에는 다소 애매합니다.  
그의 정체성 역시도 다소 서구적입니다. 먼저 다음 포스터를 살펴볼까요?









이것은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허젠핑 개인전 포스터인데 모든 글자들의 중간을 마치 먹으로 휘갈긴 것처럼 뭉개놓았습니다. 내용이나 글씨체 모두 서양의 폰트인데 먹의 느낌 때문에 어딘가 서예 작품과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영어 활자와 먹의 경계는 In Between(사이에서)이라는 문구와도 일치합니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중국과 독일 ‘사이에’ 있는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사이에’ 있는 디자인 작업은 계속됩니다. 산수화에 알파벳을 절묘하게 집어넣는가 하면 올림픽의 오륜기를 만리장성 속에 집어넣기도 합니다. 기하학적이고 단단한 영문 폰트가 산수화의 부드러운 수묵과 대비를 이루면서도 뒤섞여 어우러지는 모습은 중국 태생의 독일 디자이너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입니다.
 








허젠핑은 본래 산수화를 좋아하여 서예가를 꿈꾸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예과의 입시 경쟁률이 매우 치열하여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장 쉽게 입학할 수 있는 디자인과에 들어간 것이었입니다. 디자인과는 꽤 적성에 맞았지만 당시 중국의 디자인 교육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독일 유학을 감행했습니다. 그동안 배웠던 디자인 교육과 독일의 교육은 완전히 달랐고 현대 서양의 디자인과 회화들은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배운 것을 완전히 잊고 서양 디자이너처럼 작업하려 했지만 그들과 뿌리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남들과 다르다면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소재로 작업을 하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나로서도 더 자연스러운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후로 그의 작업은 독일 디자인에 기반하지만 어딘가 동양미가 흐르는 작업으로 변모합니다.
이 미학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다음 작품입니다. 모교인 항저우 미술학원의 전시 포스터 작업을 맡은 그는 다른 표현을 모두 생략하고 오로지 예술(藝術)을 한자로만 써서 내보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똑 떨어진 형태가 아니라 경계가 불분명하고 희끄무레합니다. 겉보기에는 무성의해보이는 포스터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포스터는 동양 미학의 정수입니다.




중국미술학원 75주년 포스터 <75th Anniversary of China Academy of Art>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
“유,무는 같은 데서 나와 이름만 달리할 뿐이어서 이 같음을 일컬어 현이라 한다.”

한마디로 있음과 없음은 결국 하나이며 이 둘을 구분 짓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현(玄)’이란 검을 현, 그리고 가물가물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구분과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한 희끄무레한 상태입니다. 노자는 세상이 정확히 흑백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며 흑백 사이의 무한한 회색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렇기에 수묵화에서 먹과 여백을 경계 짓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먹빛과 번짐 효과를 통해 세계의 오묘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즉 예술이라는 한자를 정확히 흑백으로 구분 짓지 않고 경계를 뭉개어놓은 이 작품은 현의 세계를 표현한 디자인입니다. 허젠핑은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이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흑백의 원리가 아니라 경계 없이 모든 변화와 다양성을 포용하는 작업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작업한 다른 포스터들에서도 이렇게 경계 없음의 미학을 추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양에 살고 있는 디자이너가 가장 동양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어쩌면 그는 일찍이 서양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서양의 차이를 묻고 자신의 작업에 그 차이를 녹여냈던 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허젠핑은 동양과 서양, 중국과 독일, 항저우와 베를린, 두 세계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넘나드며 융합을 꾀하는 그는 너무나 세계적인, 그러면서도 지극히 중국적인 디자이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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