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래픽 디자이너 비쉐펑의 출발은 화려했다. 그는 중국 허베이(河北)출신 디자이너로 중국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선전(深圳)의 지아메이디자인(嘉美设计)에서 근무했다. 역량이 뛰어났던 것 때문인지 비쉐펑은 평사원에서 이 기업의 대표까지 역임하며 브루노 국제 디자인, 프랑스 포스터 전시회,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그는 늘 고객과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결과물을 탄생시키며 선전에서 성공한 디자이너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그를 '중국 남부의 별'에서 '중국의 별'로, 또 '세계의 별'로 성장했다며 추켜세웠다.
그러던 중 그는 홀연히 유럽으로 떠나 파리에 4개월간 체류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 독일 디자인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며 유럽의 선진디자인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펼쳐왔던 상업적 디자인만이 디자인의 전부가 아니며 예술성이 뛰어난 디자인 역시 그래픽디자인의 범주안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회화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그래픽디자이너들이 순수예술과 회화에 기반한 작업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비쉐펑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프랑스식 디자인에 영향을 받아 '모교'란 작품을 발표한다. '모교'는 자신이 졸업한 중국미술학원의 개교기념일을 맞아 제작한 포스터다. 중국미술학원의 예술적인 느낌을 포스터에 적극 반영하였고 물감을 우유병으로 치환하여 엄처럼 자신을 길러준 모교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이후 그의 작품을 보면 정확히 형태가 있는 구상적인 포스터에서 벗어나 마치 현대예술처럼 형태들을 고도로 추상화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특히 파리에서 발표한 그의 포스터들을 보면 문자들을 해체해놓아 그래픽 자체의 회화성을 강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후 영국에서 만난 디자인 대부, 알란 플레처alan fletcher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비쉐펑은 그에게 디자인 방법을 사사받으려 했으나 영국의 디자이너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나는 아무런 의견도 없고 어떤 의견도 당신에게 제시할 수 없다. 당신의 문화적 배경 아래 당신 나라의 정체성을 반영한 디자인을 펼치는게 중요하다. 나는 그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일이다." 비쉐펑은 알란 플체어와의 만남에서 디자이너는 자국의 문화를 작품에 반영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다. 비쉐펑은 중국화가 중국을 느끼는 독특한 조형언어가 된것처럼, 중국의 디자인 역시 중국적 요소로 차별적인 문화코드를 가져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디자인을 보면 많은 작품에서 한자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천국제수묵화전시>에서 그는 한자의 획들이 모여 글자를 형성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마치 동양화의 획처럼 자유롭게 그어진 선들이 모여 수묵(水墨), 필묵(筆墨), 심천(深川) 이라는 한자를 만들어내는 형상은 동양화와 한자를 절묘하게 겹쳐 표현한 디자인작품이다. 그리고 획의 일부를 은은하게 지워진 것처럼 디자인해 동양의 아스라한 여백미를 강조했다. 이 전시의 도록에서 그는 트레싱지에 이 획들을 각각 인쇄해 각 장에는 동양화의 필획이지만 종이를 합치면 전체 글자가 나오도록 디자인했다. 획이 결합해 문자가 되는 한자의 특수성을 이용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렇게 한자의 획의 특성을 반영한 그의 시도는 다른 작품에서도 보여진다. <심천그래픽디자인6전>이란 포스터에서는 트레싱지가 아닌 투명 필름지에 6인 디자이너 한자의 획을 각 장에 인쇄했다. 6인 디자이너의 한자를 분해해 이 디자이너의 특성을 심층적으로 파헤쳐보자는 전시의 의도가 드러난 컨셉이다.
<심천문예통신>이라는 책의 표지를 보더라도 평범한 '문예지'역시 동양적인 느낌을 담은 것을 볼 수 있다. 문예라는 특성에 맞게 책의 단면들을 추상화한 것이 인상적인데 현대책부터 중국 전통 제본책까지의 다양한 책의 종류들의 단면을 먹으로 찍어 표지 전면에 등장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쉼표나 따옴표같은 현대의 문장부호들을 배치시켜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동시에 강조했다.
이처럼 비쉐펑은 한자부터 먹까지 중국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디자인 요소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선전의 잘나가는 상업 디자이너에서 중국 정체성을 탐구하는 디자이너로 변신한 비쉐펑의 행보를 앞으로 주목해보자.
해당 포스트는 저서 <중국디자인이 온다>에서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