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는 것 없이 자신감만 충만했던 그 시절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50개 남짓한 서류전형 탈락 후, 운 좋게 서류전형을 통과한 기업에 1차 면접 장소로 가던 길이었다. 빌딩 숲 속을 헤쳐가던 버스에서 내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도로 위에 서서 하늘을 뚫을 듯 솟아있는 건물들 꼭대기를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평소 음악 고르는 걸 귀찮아하던 나는 이어폰을 대충 귀에 얹고, 아무 곡이나 흘러나오도록 랜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 곡, 저 곡, 나에게 큰 의미 없는 노래들이 몇 개 지나가고, '배치기'라는 2인조 래퍼가 부르던 '두 마리'라는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옥같은 노랫말 하나하나가 버릴 것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빌딩 숲 속을 걸으며 1차 면접을 보러 가던 나는 "이 넓은 땅덩이 수많은 빌딩에 내 몸 하나 발 붙일 곳이 없어"라는 가사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그대로 가사에 새겨져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감상에 깊이 잠길 여유도 없이 발길을 재촉하여 걷다 보니 면접 장소에 금세 도착하게 되었다. 당일 지원자 중 면접 대기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덕분에 주변을 둘러보며 한 숨 돌릴 여유가 있었고, 대기장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사보가 눈에 띄었다. 면접 시작까지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남아있던 터라 진열해 놓은 사보를 한 권 한 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보를 읽다 보니 이 기업이 어떤 문화를 추구하는지, 어떤 상품을 주력으로 판매하고자 하는지 흐름이 보였다. 특히 인터넷이나 회사 소개 홈페이지에서 알기 어려웠던 세부적인 내용까지 담고 있어 짧은 시간 안에 생각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덕분에 긴 대기시간을 그다지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실무진의 1차 면접은 PT면접과 토론면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PT 면접 준비를 위한 또 다른 대기장으로 이동하여 기다려야 했고, 주어질 문제는 어떤 것이 주어질지 사전에 알지 못했다. 두근두근... PT 면접 문제가 공개되었다.
자사 상품에 호의적이지 않은 고객을 대상으로
자사의 상품을 소개하고 판매해 보시오.
PT면접에서 자사의 상품을 판매해보라니...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했고,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 잠시 머리가 하얘졌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생각해보니, 몇 시간 전에 대기장에서 정독하여 읽은 글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재미있게도 사보에는 그 시기에 회사에서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는 상품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던 자료가 있었고, 상품명뿐 아니라 어느 기관에서 어떤 상을 받았는지, 출시 며칠 만에 어느 정도의 고객에게 판매가 되었는지 등이 따끈따끈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던 터라 3분의 짧은 준비시간 동안 운 좋게 잘 준비해서 면접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덕분에 PT면접은 깔끔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고, 후련한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었다.
다음은 토론 면접이었다. 6명 또는 7명이 한 조가 되어 면접장에 들어간 후, 하나의 주제에 대해 찬반으로 팀을 나누어 상호 간 토론을 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속한 조는 랜덤 하게 7명이 선정되었고, 같은 조로 편성된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토론면접에서 찬반 논쟁을 하게 될 주제는 면접위원이 현장에서 바로 제시를 해주었고, 당시 제시된 주제가 지금 정확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당시 꽤 뜨거웠던 정치적 이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는 당시 토론 주제가 제시되었을 때,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주제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토론 주제가 주어지고 나서 나머지 여섯 명의 지원자들의 얼굴을 보니, 기본적으로 내용은 모두 아는 눈치였다. 해당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토론 참여자는 7명, 홀수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다. 면접관은 나에게 왜 손을 들고 있는지 물었다. "토론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3명씩 찬반을 나누어 구성되어야 할 것 같은데, 현재 총 7명이니 제가 사회를 보겠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면접관은 면접 참여자에게 최대한 자율권을 주고자 한다며, 다른 지원자들이 모두 동의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주었다. 다행히 다른 지원자들은 각자의 논리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한창 머릿속에서 준비 중이었기에 내가 사회를 보든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사회자가 된 나는 공평하게 찬성과 반대를 3명씩 나누었고, 각각 1명씩 돌아가며 논거를 펼치고 반박도 할 수 있게 토론을 진행하였다. 나름 매끄럽게 진행이 되었는데, 찬성과 반대의 첨예한 대립 과정을 중간에서 모두 듣다 보니, 전혀 알지 못했던 주제였는데 그 찰나에 꽤나 많이 알게 되었다. 각 지원자들은 자신들이 공부해온 내용을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잘 정리해서 말해주었고, 나는 토론이 끝날 무렵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잘 정리하는 멘트를 날리며 큰 역할 없이 무난하게 토론면접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친 실무진 면접에서 합격통지를 받았고, 이후 최종면접인 임원 면접장으로 향했다. 임원면접은 8대 8 면접으로 진행되었는데 임원은 사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많이 겸손해지고 조심스러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아무 근거 없이) 근자감이 대단했었던 것 같다. 앞에 나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의사결정권자들이 앉아 있었지만, 그저 '옆집 아저씨를 집 앞에서 만났는데, 내가 뭐하는 놈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고, 나는 대답할 뿐'이라 생각하며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당시 자세도 다른 지원자들은 곧은 자세로 주먹을 무릎에 붙이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나는 책상에 한쪽 팔을 올리고 다른 지원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봤던 것 같다.) 다대다 면접이다 보니, 나에게 온 질문은 고작 두 가지였는데, 질문내용과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Q1) 우리가 왜 당신을 채용해야 하나요?
A1) 나는 ㅇㅇㅇㅇ 한 사람이니(자세한 내용은 낯 부끄러워서 생략한다.), 저를 채용하는 것이 이 회사에 결과적으로 이롭기 때문입니다.
Q2)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어떻게 성장할 계획인가요?
A2) 지금은 비록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나중에는 (사장님을 공손히 가리키며)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겁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서류전형 50개 넘게 탈락하고 겨우 하나 얻은 면접에 임하는 지원자 치고는 대책 없이 센 척했던 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당시 경영진은 그런 패기를 높게 평가해준 것 같다. 그리고 결국 최종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그 회사에서 현재까지 근무하며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돌이켜 고백해보자면, 당시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면접에 대비한 준비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고, 정말 아무런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근자감' 하나 가지고 면접장에 들어갔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억지로 한 가지의 교훈을 꺼내어 본다면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근거가 없어도, 자신감은 있어야 한다.
그 후 어느새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좌충우돌하던 신입사원 생활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회사 내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다방면으로 공부도 꾸준히 하다 보니, 직무 전문성도 깊어져 가는 느낌이 들고, 지금처럼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글도 쓰는 여유까지 생기게 되었다.
HRM으로부터 시작하여, HRD(Learning)와 조직문화(Culture) 업무까지 두루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의도치 않게 People & Culture 관련 다양한 실무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특히 HRD와 조직문화와 관련한 업무를 메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야와 관련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느꼈던 점들과 이 분야에 이제 막 입문하셨거나 입문하고자 노력 중인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내용들을 담아 주제별로 간략히 요약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