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연 Sep 25. 2024

<은막의 개척자 나운규>(1965) ②

영화사가 노만 62

<심청전>(1925, 이경손 감독)의 한 장면


(①에서 계속)


예술을 찾아서


  1924년 나운규는 영화제작의 거보(巨步)를 내디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했다. 그가 영화계에 투신했을 때는 이미 3개의 큰 회사가 발족한 후였으며 그 중에서도 1923년에 설립된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는 일본인 '하야카와(早川孤舟)'가 경영하는 최초의 흥행극 영화제작사였다. 동아문화협회의 제1작 <춘향전>의 흥행적인 성공으로 제작사가 증가되고, 그 이듬해부터 흥행 극영화 제작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단성사 영화제작부의 설치와 함께 최초로 한국인의 힘으로 완성된 <장화홍련전>이 1924년에 발표되었는데 특히 이 작품은 최초의 카메라맨 이필우(李弼雨)의 촬영으로 완성되었다. 박승필(朴承弼)의 단성사 제작부의 설치와 거의 동시에 발족한 회사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였다. 이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역시 일본인의 투자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공칭자본금 20만원의 1회 불입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회사였다.

  나운규가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이미 <해의 비곡>이란 첫 작품을 제작한 직후였다. 이 회사는 영화기업화를 목적으로 촬영소, 라비 등의 시설을 갖추는 한편 해외 배급망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다카사(高佐貫長)'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필렬(王必烈)이란 한국이름으로 <해의 비곡>을 감독하였으니 이는 당시 관객의 욕구에 의한 결과였다. 즉 활동사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 흥행적으로 성공한 것은 한국 관객이 한국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의식적으로 관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영화제작 과정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완성했다는 깊은 인상을 관객에게 주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일본인 '다카사'도 한국인처럼 왕필렬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월하의 맹세>를 감독한 바 있는 윤백남(尹白南)을 맞아들인 것도 실질적인 한국인 작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부산에 있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나운규가 입사했을 때에는 이미 '무대예술연구회' 출신의 이경손(李慶孫), 안종화(安鍾和), 유영로(兪英路), 윤헌(尹櫶), 이주경(李周璟)을 비롯하여 이월화(李月華), 이채전(李彩田) 등의 여배우와 박승호(朴勝浩), 일본인 주삼손(朱三孫), 그리고 윤백남, 주인규(朱仁奎) 등이 있었다.

  나운규는 안종화의 추천으로 입사하기는 했으나 연구생 자격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였으니 당시 그가 그의 친구인 김용국(金容國)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그의 영화관을 피력하고 있다.


내가 찾던 길, 내 소지(素地)를 시험해볼 곳이래야 지금의 조선에서는 이 곳 뿐이기에 찾아온 것이며 또 내가 항상 동경하는 예술이 하루속히 우리 민중에게 표명되어 그들로 하여금 감상케 하고 그네들을 웃기고 그네들과 한가지로 울 수가 있다면 그 뿐이 아니겠느냐. 김군아 어쨌든 나는 오랫동안 헤매이던 미로에서 해결하였다. 환경이란 서리에 시들었던 내 이상의 싹이 한잎 두잎 피게 될 봄이 점점 가까와 오는 것 같다. 이 길이 이제야 내 앞에 전개된 것이 얼마나 늦었는가를 너도 잘 알것이다. -- <<문예영화>> 창간호에서 --


  나운규는 <운영전>에 연기자로 데뷰했다. 이 작품은 윤백남이 각색, 감독한 것으로 한국 고대소설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안평대군의 수성궁비사(壽聖宮秘史)로 주연은 안종화, 김우연(金雨燕)이었고 나운규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단역이었다.

  사실 그는 연기자로서의 요건을 구비하고 있지 못했다. 보통보다 작은 키에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마스크'였다. 특히 당시엔 세계적으로 미남 미녀 '스타아 시스템'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비록 초창기라고는 하지만 한국 관객도 미남 미녀를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조선키네마에서는 이 한 작품에 선을 보엿을 뿐 곧 상경했다.

  윤백남은 <운영전>을 끝내고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그 회사를 사퇴했으니 이는 그네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 대자본을 투자하지 않아도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윤백남은 조감독 이경손을 비롯하여 윤용갑(尹容甲), 남궁운(南宮雲), '니시카와(西川秀洋)', 나운규 등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 백남프로덕션을 설립했다.

  백남프로덕션에서는 <심청전>을 제작했다. 여기서 비로소 나운규는 일약 심봉사역을 맡아 그 진면목을 보이는 듯 했으나 불행히도 <심청전>은 흥행적인 실패로 나운규의 뛰어난 연기도 빛을 잃고 말았다.

  백남프로덕션은 이 한 작품을 끝으로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 회사의 멤버들은 고려키네마에서 <개척자>를 끝내고 조일제(趙一齊)가 설립한 '계림영화협회'로 들어갔다. <장한몽>을 제작했으나 나운규에게 이렇다 할 역할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이경손 멤버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당시 '요도(淀)'란 일본인은 '조선키네마'란 제작회사를 창립했다. 조선키네마의 운영은 '요도'의 친척 '쓰모리(津守)'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과 배우는 모두 한국인을 등용하여 제작했읜 그 첫작품이 <농중조(籠中鳥)>였다. 이 작품은 이규설(李圭卨)이 감독, 주연을 맡았고 나운규가 조감독 겸 조연을 맡았으며, 신인 복혜숙(卜惠淑)이 데뷰했다. 여기서 나운규는 비로소 그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일약 유명한 배우가 되었고 천재란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쓰모리'에게 인정받게 되어 조선키네마에서는 제2회작으로 <아리랑>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각본, 감독은 나운규가 아니라 김창선(金昌善)이란 명의로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김창선이란 곧 '쓰모리'의 한국 이름이었다. 이것은 나운규가 창안한 묘안이었으니, 그 당시 총독부의 영화 검열이 가혹하여, 조금이라도 민족사상이 담긴 작품은 여지없이 가위질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울분으로 일관된 <아리랑>이 세상에 나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운규의 묘안이란 바로 일본인 '쓰모리'를 이용하여, 그 명의로 발표하면 검열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었다.

  이 영화검열은 1922년부터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외국영화에 치중하여 풍기문란(특히 키스, 포옹)나 폭력 등에 관해 중점적인 검열을 했으나 한국영화 제작 편수가 증가됨에 따라 1925년에는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제정, 그해 7월 5일 총독부령 제59호로 공포 시행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식이 내포되어 있는 작품은 부분적으로 절단되거나 혹은 상연이 금지되었다. 이 규정은 1927년 9월 19일 다시 개정 강화되었고 1934년 8월에는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으로 변경, 소위 조선통치의 근본방침인 일선일체(日鮮一體)의 이념을 철저히 보급하기 위하여 민족적인 색채가 조금이라도 내포되어 있는 작품은 상연을 불허했다. 이러한 영화 검열이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이와 같은 갖은 역경 속에서 제작된 것이다.

  <아리랑>은 '고양이와 개'라는 상징적인 자막부터 시작되어 광인(狂人) 영진과 오가(吳哥)가 견원(犬猿)의 사이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곧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이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이러한 상징적 수법을 채택한 것도 일제의 검열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 변형된 인간상을 똑똑히 인식하고 공명,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 <아리랑>에서 잠재되어 있던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반항심을 되찾을 수 있었고, '라스트 시인'에서 영진이 정신을 회복하여 수갑을 차고 아리랑고개를 넘을 때 관객들은 나라 없는 설움을 통절히 느끼면서 주인공과 함께 눈물지었던 것이다.

  <아리랑>이 상징적인 표현 방법으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검열의 관문을 뚫고 일반에까지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유력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작사의 작품이었던 때문이다. 나운규의 이 일제에 대한 저항 작품이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작사에서 발표되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칼'한 일이었다. 조선키네마는 <아리랑>의 성공으로 많은 이익을 얻자 계속 나운규로 하여금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허용했다. 나운규는 또한 <아리랑>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서 각본, 감독, 주연을 아울러 담당하여 영화계의 제1인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③에서 계속)

<농중조>(1926, 이규설 감독)의 한 장면.



매거진의 이전글 <은막의 개척자 나운규>(1965) 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