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부터 1929년까지의 한국의 영화계는 나운규시대라고 할 만큼 그의 독무대였다. <아리랑>에 이어 그는 조선키네마에서 <풍운아>, <들쥐>, <금붕어>를 계속 발표했다.
특히 <들쥐>는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상연 도중 조선총독부 도서과에서 상연을 불허하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편집하여 9권의 작품을 8권으로 줄여서 상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물론 일본인 제작자의 노력으로 상영 허가는 얻게 되었다. <들쥐>가 이와 같이 영화 검열로 인하여 개작을 면치 못하게 되자 결국 흥행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들쥐>가 검열문제로 인하여 부진상태에 빠지자 조선키네마의 경영주는 나운규의 작품 활동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검열에서 저촉될만 한 것은 피하려고 흥행 본위의 작품을 제작하라고 나운규에게 강요했다.
사실 조선키네마가 전적으로 나운규에게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허용한 것은 그의 인기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려는 목적이었고 나운규 역시 일본인의 자본으로 만들고 싶은 작품을 제뜻대로 제작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오월동주(吳越同舟)격이었다.
서로 상반된 사고에서 출발한 제휴는 <들쥐>로 인하여 그 유대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27년 드디어 나운규는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독립프로덕션을 설립했다. 나운규와 행동을 같이 한 사람들은 촬영기사 이창용, 이명우를 비롯하여 주삼손, 이경선, 윤봉춘, 이금룡 등이었다. 이밖에 신인 전옥, 김연실 등의 여배우가 가세하여 여기에 '나운규프로덕션'의 발족을 보게된 것이다.
나운규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은 <잘있거라>였다. 제작담당은 박정현이었으니 그는 나운규프로덕션의 실질적인 경영자였다. 이 프로덕션의 제작비는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이 투자하였으나 그 운영의 실천은 박승필의 대리인인 박정현이 장악하고 있었다. <잘있거라>에 이어 <옥녀> 역시 단성사의 후원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그후 제3회작 <사랑을찾아서>는 다시 조선키네마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나운규가 탈퇴한 후 조선키네마는 <뿔빠진 황소>를 발표했으나 나운규의 <잘있거라>와 대결하게 되어 참패를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 다시 나운규로 하여금 작품 활동을 허용하였으나 이 <사랑을 찾아서> 역시 극심한 검열 수난을 당했다. 즉 이 작품의 원제는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제명이 불온하다 하여 <저 강을 건너서>라고 개제하게 했고 다시 검열 당국인 도서과에서 <사랑을 찾아서>라고 친절히 제명을 지어주었다.
이러한 검열 수난으로 나운규는 또 다시 조선키네마의 후원을 얻지 못한 채 제4회작 <사나이>의 제작에 착수했다. 이 작품은 홍개명이 감독을 맡고 나운규는 각색과 주연만 담당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극심한 경제적 위협을 받기 시작하여 작품 활동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아울러 영화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다.
작가적인 의욕을 상실하자 그의 사생활은 점차적으로 무질서하게 되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설사 흥행에 성공했따 하더라도 이권은 자본주에게만 돌아가니 남는 것은 허탈과 생활고 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점점 작품활동에 열의를 잃고 있었다.
4개월여의 제작 시일이 소요된 <사나이>의 흥행적 실패는 그 이상의 제작을 계속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당시 사회상이 급박했기 때문에 흥행사업이 저조해 있던 것이 큰 원인의 하나였다.
나운규프로덕션은 다음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찬영회(讚映會) 주최로 그 멤버를 무대에 올려 모의촬영 실연도 하였다. 이 모의촬영이란 무대에서 영화촬영 광경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으로 <장한몽> 촬영 모습을 재연한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악전고투하면서 나운규프로덕션은 제5회작으로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으니 제작은 유엽(柳葉)이 담당했다. 이 <벙어리 삼룡>은 1928년 12월에 제작 완성하여서 그 이듬해 1월에 개봉한 작품이다. 그러나 결국 나운규프로덕션은 이상 다섯개의 작품을 남기고는 더 작품을 내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병든 춘사의 낭만
1928년 여름 한국의 곡창지대라고 할 수 있는 호남 지방을 비롯한 영남 일대의 한재(旱災)로 곤궁한 농민이 무려 25만호였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가구수는 무려 3만호나 되었다. 이러한 공식 통ㄱ는 실수효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으니 점차로 농토를 버리고 떠나는 이향민이 날로 늘어갔다.
한편 호남지방의 한발과 아울러 관북지방에는 대홍수 사태가 났다. 함남 일대에서는 죽은 자만도 천여명이 넘었고 신흥, 풍산, 홍원의 세 군에서도 익사자가 428명이나 되었다. 또 이 밖에 가옥 유실도 막대한 수에 달하였다.
이러한 천재는 그 해와 그 이듬해까지 식량 사정의 악화를 초래했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무력에 의한 사건들이 연발하는 한편 조선일보의 정간처분, 그리고 수원고농(水原高農) 사건이 일어났으며, 학생 결사사건 등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밖에도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말미암아 백여학교가 폐쇄되었고 의주 독립단의 출현 등과 아울러 일제의 검거 선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는 유명한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경제사정의 악화와 사회의 불안은 필연적으로 한국영화계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흥행의 저조와 함께 제작의 제한은 물론, 작품의 질적 저하가 불가피한 사실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 환경에서 나운규는 프로덕션을 잃고 작가적 열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약 2년간 영화의 위기에서 벗어난 1930년부터 그가 사방한 1937년까지 8년간의 그의 활동은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작가정신은 물론 작품에 일하는 태도나 사생활까지도 전반기와는 천양지차였다. 조선키네마에서부터 나운규와 고생을 같이 해온 이금룡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춘사는 매일 밤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4, 5일씩 자취를 감추기도 했으며 어찌어찌 들어온다는 것이 죄지은 사람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없이 들어와 자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필경 여인으로 해서 무슨 일을 당하고야 말지"
이렇게 마음 속으로 그를 염려하고 그가 바른 길로 나서기를 바랄 수는 있찌만 누구나 그의 앞에 나서서 직접 대놓고 그의 방종한 성생활을 끊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춘사의 성질이란 한 번 화가 뻗치면 쇠망나니로 표변(豹變)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친구거나 형제거나 닥치는 대로 받아 넘기는 것이어서 섣볼리 건드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의 사랑의 대상은 모두가 화류계의 기녀들 뿐이어서 거의 생활은 나롤 전락하여 갔고 따라서 춘사의 영화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신망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춘사는 건강을 잃기 시작했다.
기침을 할 때 마다 실낱 같은 빨간 피가 섞이어 나왔다. 작품을 만들 정열과 기분 조차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럴 수록 춘사의 방종의 불길은 더욱 힘차게 타오랄 처자도 돌보지 않고 천하의 명기의 보드라운 무릎을 베고 그들이 타는 거문고 소리에 일월이 기우는 것을 잊고 말았다. --- 1933년 1월 17일자 《제일신보》에서 ---
나운규가 <사나이>에서 '픽 업'한 유신방(柳新芳)은 사실 기생 출신으로 그의 내연의 처였다. 그는 <철인도>에서 그와 공연까지 했으나 곧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인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현방란(玄芳蘭)이란 여배우를 <무화과>, <그림자>에 출연시킨 것은 그가 생활의 방도를 얻기 위해 지방 순회 극단에 들어갔을 때 인연을 맺게 된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나운규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일본인 감독의 <금강한>, <남편은 경비대로>에서 일본인 '도오야마(遠山滿)'와의 공연까지도 사양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칠번통소사건>, <무화과>, <그림자>와 같은 졸작도 만들었다.
그러나 <개화당이문>, <종로>, <강건너 마을>, <아리랑 3편> 등은 그의 떨어진 명성을 되찾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한번 사라진 인기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갔으니 마지막 작품 <오몽녀>를 끝냈을 때는 거의 사경에 이르렀다.
당시의 한국영화계는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전환한 단계였던지라 이 <오몽녀>도 토오키 작품으로 <아리랑>과 비견할 수 있는 가작이었다. 또한 나운규는 이 작품에서 연출만을 담당했으니 <아리랑> 이후 각본, 감독, 주연의 1인 3역을 해내던 시기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사생활이나 작가적 태도는 이 무렵부터 건실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병든 그의 육체는 그에게 작품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37년 8월 9일 고요한 죽음의 장막은 나운규의 예술과 영혼을 영원히 앗아갔다.
춘사 나운규의 영화정신은 한마디로 말하여 피압박 민족의 저항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아리랑>을 비롯하여 <풍운아>, <들쥐>,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 <임자없는 나룻배>, <아리랑 3편>, <오몽녀> 등은 한결같이 타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것이 비록 서민생활에 기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한결같이 사회에 대한 고발이요 반항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는 인도주의적 경향도 내포되어 있었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그가 작품활동을 한 것은 일제 치하요 일제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던 시기였던 만큼 그의 항거는 곧 상징적 수법에 의한 것이었다. 때문에 변형된 인간상, 변형된 환경을 나운규는 창조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 주제 역시 모두 내면세계로 창조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의 <아리랑>으로 출발한 나운규의 극예술은 끝내 저항정신으로 그 막을 내렸던 것이다.
노 만
1935년 평남 용강 출생. 서울대학교 문과대학 졸업. 영화사, 영화이론 전공.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강사. <주요저서> [한국영화사]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