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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Sep 27. 2024

<성적 매력의 변천을 좇아서>(1962) ①

영화사가 노만 64

잡지 <여원> 1962년 1월호 표지.


성적 매력의 변천을 좇아서

: M.M.에서 B.B 그리고 C.C로 옮겨온 여배우의 성적매력의 해부     


노 만     


쎅스.아필의 여인군(女人群)    

 

  쎅스·아필(性的魅力)이란 어휘가 생긴 것은 스타·씨스템이 확립한 20세기 초기에서 부터였다. 스타가 쎅스·아필을 의식적으로 들고 나온 것은 물론 관객의 추이(推移)에 영합한 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관객이 영화에서 섹스를 원하게 되는 것은 전후(戰後)나 대공황시대(大恐慌時代)와 같은 환경 속에서 불안 의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우리도 경험한 바이지만 6.25 이후에 국민들의 사치는 이러한 형태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일면이었다. 쎅스·아필을 희구하는 관객의 추이란 바로 이러한 심리적인 현상인 것이다. 관객의 이러한 동향을 가장 빨리 캣취한 사람은 물론 영화제작가로서 배우로 하여금 이 관객의 동향에 구미를 맞추게 했으니, 여기서 쎅스·아필의 여배우를 등장시켰다. 이 쎅스·아필의 스타로 하여금 관객을 관능적(官能的)으로 마비시켰던 것이다.

  초기의 쎅스·아필의 왕좌를 차지한 스타는 크라라·보우였다. 아직까지 그녀의 강력한 성적 배력을 능가할 만 한 스타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쎅스·아필의 대명사는 그녀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라라.보우는 잇트.걸로 통했는데 잇트(It)란 바로 성(性)과 성적 매력을 지칭하는 단어로 그 시대에 유행했다. 이 새로운 단어 ‘잇트’가 세계적으로 퍼져감에 따라 크라라,보우의 인기는 날로 높아갔던 것이다.

  즐거운 듯 발랄한 쎅스·아필 — 거기에 째즈와 같은 경박성이 크라라.보우를 세계적인 ‘후랩파’로 만들어노았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또한 남성들이 여성을 친구라고 생각하던 때이니 만큼 그녀가 가슴과 허리, 허벅 다리를 그대로 들어 내어놓고 노골적인 춤을 출 때 남성들은 열광했던 것이다. 그녀는 글자 그대로 남성의 혼을 한몸에 휘어 잡았던 것이다.

  이 크라라·보우의 뒤를 이어 쎅스·아필의 스타 진·하로우가 나왔다. 그녀는 세계 배우 사상 최고의 인기를 점령할 만 한 요염한 여배우였다. 그녀가 <지옥의 천사>에서 상대역 여배우와 연기하고 있던 도중에

  “잠간만,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올께요.”

라고 한 말은 당대의 남성들을 뇌살시켰던 것이다.

  크라라·보우가 전라로 나타나 남성들을 매혹시켰다면, 진·하로우는 선천적으로 나타난 바탕 — 쎅스·아필— 으로 남성을 휘어잡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지닌 ‘백금색 머리’(p’atinum Blonde)는 당시 M.G.M에서 ‘쎅스’의 상징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쎅스·아필이란 단어는 이 진·하로우에 와서 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성적 매력이 강렬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26세란 젊디 젊은 나이로 한 세상을 마친 때문에 그녀의 진가를 더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전후하여 데다·바라(Theda Bara), 포라·네그리, 메·웨스트(Mae West), 존·크로포오드, 마리네·데트리히 등 쟁쟁한 쎅스·아필의 여인군(女人群)이 줄지어 있지만, 2차대전 이후에 나타난 섹스 아필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M.M, B.B, C.C로의 변천을 살펴보기로 하자.     


쎅스.아필의 여왕 M.M     


  마리린·몬로 하면 곧 연상되는 것이 그 특유의 ‘엉덩이 춤’이다. ‘몬로의 걸음걸이’란 말로도 알려져 있는 허리 밑으로 움직이는 율동은, 지금까지 쎅스·아필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스타들로서도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마리린·몬로를 낳게한 것도 아주 우연한 인연에서였다.

  그녀가 생활에 곤궁을 느끼어 하는 수없이 누드·모델이 되어, 이것이 미국을 뒤덮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마리린이 스타로서 유명해질 때였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무척 당황했으나 본인은 아주 태연히, 그 누드.모델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명백히 했고 먹기 위해 별 수 없었음을 덧붙였던 것이다. 이 대담하고 솔직한 태도는 그녀의 인기를 더해주었고 오늘날의 대 마리린·몬로를 낳게 해준 커다란 사건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마리린은

  “성이란 자연의 일부야요. 전 차라리 자연에 몸을 내맡기고 살고 싶어요.”

어떤 사람이 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을 때 서슴치않고 대답한 말이었다. 사실 그녀에겐 성이란 자연 그대로, 그녀의 몸에 배어있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의 동작도 교태를 부리지 않고는 못배기는 여인으로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로스안젤스에서 제과업을 하는 아버지와 필림 정리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리린·몬로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마리린을 고아원에 맡기고는 행방을 감췄다. 고아 아닌 고아로서 자라난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하였고 또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탓인지 조숙한 편으로 이미 열다섯살에 결혼했고 일년 남짓하여 이혼하고는 일자리를 구하면서 전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다 못하여 사진 모델이 되어 그녀의 사진이 잡지 표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20세기 폭스사에서 스크린·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내가 그녀를 대했을 때 첫눈에 진·하로우가 될 수 있는 여인이란걸 알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는 타고난 미인인데다가 일종의 수줍은 열등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울려 아주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마리린을 테스크한 캬메라맨의 말이었다.


(②에서 계속)


(잡지 여원 1962년 1월호(통권 77호), 여원사, 1962)

마릴린 먼로의 출연작 <사랑을 합시다>(1960, 조지 큐커 감독)의 1961년 1월 국내 개봉 당시 신문광고. 조선일보 1961.1.25, 석간 4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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