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인문관 앞에서. 왼쪽부터 영화미술가 정도수 교수, 학과장 김소동 교수,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1960년을 기점으로 나는 《주간 삼천리》를 마지막으로 잡지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저술가이자 영화평론가로, 대학 강단에서 영화를 강의하는 교육자로 나서게 되었다.
대학에서 영화 관련 전공과 강좌가 마련된 것은 1953년 5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설립된 서라벌예술대학은 문예창작학과, 음악과와 함께 개설된 연극영화과가 최초였다. 학교에서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혹은 체계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1960년 한양대학교에 영화과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주요 대학에 영화학과가 하나둘씩 개설되었다.
강단에 서게 된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시 학과장으로 부임하고 있던 김소동 교수의 요청으로 한양대학교 영화과에서 '한국영화사' 과목 강의를 시작한 것이 1961년 2학기, 그해 9월부터였다. 비록 단행본 출간시도는 좌절되었지만 당시 알고 지냈던 영화인들 사이에서 내가 『한국영화사』를 집필했다는 것이 꽤 알려졌던 것 같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서 안종화 선생의 강의가 우리나라 대학에서 개설된 최초의 '한국영화사' 과목이었다면 내 강의는 영화전공 단독으로 개설된 학과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것이었다.
당시 한양대학교 영화과에는 다수의 교수진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김소동(金蘇東, 1911~1988)은 해방 직후 한국영화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작한 <목단등기>(1946)로 메가폰을 처음 잡았고, 이후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56), <아리랑>(1957), <돈>(1958)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또한 그는 1954년 영화감독협회장, 1957년 시나리오작가협회장을 거쳐 1960년 한양대학교 영화과 학과장 교수를 거쳐 1972년에는 한국영화학회 창립 멤버이자 초대 학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와 함께 1973년 한양대학교 문리대에서 학위논문「언어의 리듬이 영화영상에 미치는 영향: 청각적 리듬을 중심으로」으로 당시 영화인으로는 최초로 문학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인물이었다. 박종대(朴鍾大) 교수는 사진 실기와 영화 촬영 과목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조선산악회 회원으로 전문 산악인이기도 했는데, 그가 과내 교수 및 학생들과 이끌던 등산 모임에 나 역시 참석하기도 했다. 1964년 7월에는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주최하는 하계 영화 제작 워크샵에서 강사진으로 함께 참여했다. 양광남(梁廣南, 1933~2009)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1955년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연극학 석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학교에서 연기 과목을 강의했다. 나중에 그는 이근삼, 김정옥과 함께 극단 '민중극단'의 창립 멤버로 활약했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의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외, 연기 과목을 지도한 양동군, 영화미술가 정도수, 이영일 등이 교수 및 강사진으로 재직해있었다.
수업은 한양대학교 인문관에서 이루어졌다. 제작 실기 워크샵에 필요한 기자재나 장비들이 충분히 갖추어진 환경도 아니었다. 이론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남아 있는 영상 자료나 필름도 없었고, 마땅한 텍스트도 없었다. 영사기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사진 자료를 볼 수 있는 슬라이드 환등기나 OHP 같은 장비도 없었다. 교탁과 칠판, 책걸상이 전부인 강의실이었다. 모든 것이 열악했다. 수업은 내가 집필한 한국영화사 원고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1963년 혹은 64년 어느 해인가, 한양대학교가 정원 외로 입학생을 많이 받았던 시기가 있었다. 평균 3~40명이던 학생 수가 6~70명으로 늘어났다. 수강생 인원이 감당이 되지 않아 강의실을 인문관 지하로 옮겨 강의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
기억에 남는 학생들이 여럿 있다. 훗날 인기 가수가 된 남진(본명 김남진, 1945~), 배우 남정임(본명 이민자, 1945~1992)을 비롯해 중견 TV 탤런트로 활약한 최불암, 임현식, 노주현, 이정섭, 조경환, 김수용 감독의 여동생 김추자, 촬영감독 박승배(朴承培, 1939~), 영화평론가로 활약한 정용탁(鄭用琢, 1945~, 한양대 명예교수) 등이 있었다. 최불암은 강의실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 남정임은 착실한 모범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그녀는 1965년 KBS 공채 5기 탤런트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66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 <유정>의 주연배우로 캐스팅되어 극중 여주인공 이름인 '남정임'을 예명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조경환은 재학 당시 과대표를 맡아 수업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도맡은 학생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박승배와는 수업 외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960년 한형모 감독과의 인연으로 촬영부 경력을 시작한 그는 1967년 정진우 감독의 <폭로>로 입봉했다. 당시 그는 영화 현장에서 촬영 조수로 일하면서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학과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는 매우 학구적이고 진지한 학생이었다. 정용탁 교수는 최근 진고개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때만 해도 꽤 연세가 많으신 원로 교수인줄로만 알았다며 실제 내 나이를 알고서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웃음). 1960년대 한양대학교 영화과 재학생 대부분이 내 수업을 거쳐갔을 것이다.
나중에는 '영화개론', '세계영화사', '영화제작론' 등 여러 과목을 강의하기도 했다. 영화제작론 수업의 경우 제작 실기 워크샵이라기 보다는 '영화산업론'에 가까웠다. 여기에는 이정선 작가, 전창근 감독과 함께 영화 <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1963)의 투자자와 제작자로 참여한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영화 제작 현장은 체계 없는 '주먹구구' 식이 많았다. 1965년 잡지 《실버스크린》에 '1964년도 한국영화총결산' 특집으로 기고한 <증가된 영화인구 시장>(1965년 1월호), <대작영화의 반성기는 왔다>(1965년 5월호)와 같은 글을 통해 당시 한국영화 제작 현장과 산업 현황을 구체적인 데이터를 토대로 조명해보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이 당시 내 수업에 투영되기도 했다.
한양대학교와 함께 한국배우전문학원과 중앙대학교에도 출강했다.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는 1963년 초 김인걸 원장의 요청으로 신인 배우 지망생들에게 '한국영화사'를 강의를 시작했고, 중앙대학교는 이중거 교수의 요청을 받아 출강했다. 이 때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한국영화사』 등사본을 발간해 수업 교재로 사용했다. 교재는 학원 현장 수강생 뿐만 아니라 통신 강의록으로도 배포되었다.
학교 강의는 1972년까지 약 10년간 했다. 개인 사업과 함께 영화계와 차츰 거리를 두면서도 강의를 이어갔다. 김소동 교수는 내게 논문을 쓰고 학위를 하라는 제안을 했다. 당시만 해도 영화학과 대학원 과정이 설립되기 이전으로, 박사학위논문 제출 만으로도 학위를 수여받을 수 있는 '구제박사(舊制博士)' 제도가 유효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영화계는 물론 학계에도 남아있을 계획이 없었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 해 1월 내가 운영하던 칠성영화주식회사가 폐업하고 영화 일을 정리하면서 더 이상 강단에도 서지 않았다. 당시 내가 운영하던 사업장은 영화계 사람들이 모이던 명동, 학교가 있던 왕십리와는 다른 을지로에 있었다. 을지로는 명동, 왕십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현장 영화인들이나 비평가들과는 별다른 왕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전창근 감독을 비롯해 김소동, 박종대 등 한양대 교수들과는 여전히 만남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