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가 노만 67
(①에서 계속)
병약한 남불(南佛)의 소녀
1950년 5월 13일, 이탤리 국경과 가까운 남불의 니이스 해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불란서 내무성의 고급 관리였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예술을 깊이 이해하는 현대 여성으로서,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아버지가 전근하게 되어 근무지인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 부모와 그녀의 두 형제와 함께, 중부 아브리카 카메룬의 도와레에 정주하게 되었다.
아무런 근심 걱정, 부자유스러운 것이 없는 이들 가정에서 그녀만이 유난히도 건강히 좋지 못했다. 이것이 그 가정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고, 적도에 가까운 이 도와라에서는 도저히 그녀의 건강이 회복될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녀가 여섯살때 불가불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단둘이서 출생지인 니이스로 돌아갔다. 그후 그녀는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하는 한편, 상류에 속하는 사숙에 다니며, 불란서 양가의 자녀들이 밟는 전형적인 코오스를 밟아, 사교계에 나가기까지 이르렀다.
이때 가장 먼저 그녀에게 주목하고 그녀의 신선한 미를 인정한 사람들이 앞서 말한 싼.포올.드.반스의 화가들이었다.
해번에서 맞은 행복
1956년의 첫 여름, 어느날 그녀에게 뜻밖의 행운의 여신이 찾아들었다. 그녀가 지중해에 접한 해안을 가벼운 옷차림으로 해안을 물끄럼이 내려다보며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 그녀는 여전히 건강이 나빴던 관계로 물에 들어가서 놀 수도 없었고 더욱 수영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해안을 자동차로 드라이브 하던 한 신사가 쟈크리이느를 보자 차를 멈추고 그녀에게 닥아왔다. 그 신사는 바로 이탤리 영화의 해외선전기관의 이사장인 에마뉴엘.캇스우트였다(현재는 제작자로 활약하고 있다).
얼마 후에 그녀는 이 에마뉴엘.캇스우트를 따라 로오마 교외에 있는 국립 촬영소 치네칫타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제작자 카르로.폰티(쏘피아.로오렌의 남편)와 감독 알벨또.랏또아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 카메라 앞에서 서서 약 10분 동안 테스트를 했다. 이때 그녀를 얼싸 안은 사람이 있었다. 이 테스트를 한 감독이 랏또아다였다. 그는 냉정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이 의외의 행동에 모두들 놀랬다.
"너야말로 구엔다리나(<애정이 싹틀 무렵>의 주인공 이름)다! 바로 그거야! 카메라.훼이스도 만점이고--. 넌 틀림없이 훌륭한 여배우가 될거야!"
이리하여 15세의 소녀 자크리이느.샤샤르는 탄생되었고, <애정이 싹틀 무렵>의 구엔다리나로서 영화에 데뷰하게 되었다.
이 카메라 테스트가 있은 후 그녀는 그해 6월, 출생지인 니이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로오마로 이사했다. 로오마에 온 그녀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버리고 오직 영화를 위한 공부만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먼저 어학에 힘쓰며 특히 족믐씩 더듬기까지 하던 모국어인 불어에서도 곧 그런 버릇을 고쳤고, 이탤리어를 배우는 데 힘썼다. 이 어학은 나이 어린 소녀에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랏또아다 감독의 지도를 순순히 잘 받아 들였고 특히 연기 공부에 있어서는 더욱 열중하였다. 몇 차례의 리하아살(연습)에서도 그녀는 한번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다.
드디어 그해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그때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늘 걱정하여 오던 그녀의 건강은 몰라보리만큼 좋아졌던 것이다. 여러가지 운동과 훈련으로 그녀의 몸은 아주 건강해졌다. 또한 그녀의 자연스런 연기에, 어머니 조차 놀랐다고 한다.
16세 스타 탄생
1957년 5월, 이탤리는 깐느 영화제에 쟈크리이느.샤샤르란 신인 스타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 영화제가 개막하기 얼마 앞서 제작된 이 <애정이 싹틀 무렵>은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만 보여주었을 뿐 아직 일반 공개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과 그녀에 대한 기대는 무엇보다도 컸었다. 그리하여 그 평가를 더욱 높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을 하기까지 했다.
깐느의 하늘에 축포가 멎고 거리가 조용해진 뒤였다(어느 영화제나 일반의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무에 거리는 혼란하고 팬으로 뒤덮이는 거싱 항례의 일이었다. 특히 깐느영화제는 축포까지 발포한다). 갑자기 환성과 박수소리가 뒤덮이는 가운데 하늘빛 제복과 흰 모자를 쓴 17명의 남녀 스쿠우타 부대가, 각각 그 스쿠우타 위에 쟈크리이느.샤샤르(Jacqueline Sasard)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들고 앞서 갔고, 바로 그 뒤에 호화로운 흰 캐디락 승용차에는 밤색 머리카락을 길게 느려뜨린 그녀가 군중의 환호에 응답하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군중의 인기를 한 몸에 모우게 된 것이었다.
지난해에는 친구와 함께 깐느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스타들을 주목하던 그녀가 일 년 후에는 깐느의 여왕과도 같이 군중 앞에 나섰던 것이다.
이 영화제가 있은 뒤에 <애정이 싹틀 무렵>은 곧 이탤리에서 상연되었다. 그러자 그곳 틴.에이져들 사이에는 그녀의 인기가 갑짜기 상스앟여, 구엔다리나 스타일의 소녀들이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오는 팬.레타 때문에 우체국이 골모리를 앓게까지 했다는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현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작품은 곧 호평을 받아 불란서에서도 상영하게 되었고, 늘 동경하던 빠리에 그녀는 급기야 가게 되었다.
"역시 빠리는 영화나 이야기를 듣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좋겠꾼요. 전 이 예술의 도시 빠리는, 살아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요." 빠리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곧 다음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다. <삼월생>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깐느영화제에 참석했을 당시, 그녀는 눈여겨 보아온 신진 감독 안토니오.페로란제리에 의해 이루워진 것이었다. 이 <삼월생>에서는 전작 <애정이 싹틀 무렵>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이 <삼월생> 다음 <Le Ragazze Chiacherate>에 출연하였고 계속하여 밋셀.보와롱 감독 작품인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에 등장하게 되었다.
쟈크리이느.샤샤르의 진가
이탤리 영화계에 픽.업된 그녀는 역시 태생이 불란서인지라, 이탤리인 답기 보다는 역시 불란서적인 것이 많고 그녀에겐 에기조틱한 세력이 있다.스크린을 통하여 보아도 알 수 있지만(<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에서), 불란서 여성들만이 모인 곳에서 그녀를 보면 확실히 이국적인 데가 있다. 그녀가 태어난 니이스는 옛날에는 이탤리의 영토였으니까, 불란서 태생이라 하지만, 혹시 이탤리의 피가 어느 조상에게 섞여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또한 그녀는 지금 불어보다도 이탤리어를 더 잘하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록 함께 이탤리에서 살지만 불어 밖에 모르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아프리카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앞니(전치)가 조금 벌어진 탓인지 잘 웃는 성격이 아니라고 하나, 오히려 입을 약간 벌리고 잇발을 보이며 웃을 때가 훨씬 싱싱하고도 귀여운 맛을 풍겨준다. 조용한 성격에 별로 화장도 않은 듯한 그녀의 투명한 모습은, 항상 상대방에게 좋은 가정 교육을 받은 양가의 처녀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녀는 즐겨 스포오츠.카아를 애용하며 자가용도 자신이 운전을 한다고 전한다. 또한 싸이크링, 수영, 때늣도 잘하는 편이다. 이러한 반면 그녀의 서재에는 뮷세와 스탕달의 저서들이 많이 꽂혀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금지된 장난>이 가장 감명깊은 영화였다고 하고 잉그릿드.버어그만과 아렉.기네스를 가장 좋아한다.
그녀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삼월생>의 감독인 안토니오.페트란체와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인기 절정에서, 모든 젊은이들의 가슴 깊이 새겨준 그녀의 매력---. 그녀는 어느 거리의 모퉁이에서 조금 전에 만난 듯한 착각을 일으켜주는 아직 애띤 20세의 소녀다. (영화평론가) ■
(잡지 여원 1962년 7월호, 여원사, 1962, 242~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