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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20. 2024

용강(龍岡)에서의 어린시절

영화사가 노만 4

노만은 1935년 양력 2월 16일 평안도 용강군 금곡면 유동리에서 부친 노응오(魯應五), 모친 이현옥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고, 또 바로 밑에 남동생이 3~4세 무렵 세상을 떠났다. 둘째인 남동생 노만원(魯萬源)은 이후 1960년대 후반 칠성영화주식회사를 함께 운영하기도 했고, 뒤늦게 신학을 공부해 장로교 목사가 되어 1984년 서울 구로구 온수동에 강남선교교회를 개척해 그곳에서 원로목사로 재직하다가 2014년 작고했다. 셋째인 여동생 노신자, 넷째인 여동생 노희자가 있고, 2022년 작고한 다섯째인 남동생 노만형, 여섯째 막내인 여동생 노재원이 있다.

노만이 태어나 자랐던 금곡면(金谷面)은 용강군의 서남부 광량만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이곳은 일찍이 평안선이 부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남포와 광량만, 온천지대를 잇는 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이 특히 발달한 지역이기도 했다. 노만은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태어나 보낸 유년시절과 해방 직후인 1946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정착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아버지는 평양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 이사를 하셨다. 당시로선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농협'의 대리쯤 되는 직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아버지가 사과를 포장하는 자동화 기계를 발명하고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사과를 포장할 때 봉투를 사람 손으로 일일이 풀로 붙여 만들었다면, 아버지가 발명했던 자동화 기계는 종이 봉투가 벌려지면 자동으로 사과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포장되는 방식이었다. 이것으로 큰 돈을 버시게 되자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전념했다. 이후 월남해서도 아버지가 여러가지 사업을 이어가신 것을 보면 아이디어나 수완은 좋은 분이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과 봉투 공장이 있던 남포에도 기차를 타고 여러 번 가보았다.

우리 식구들은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지만, 별다른 문화적인 체험을 한 기억은 없었다. 아버지는 책 한 권을 보시던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신 다음 집을 나서셨다. 그나마 기억나는 문화적 체험이라면,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공장에서 사과 포장 자동화기계에 투입된 봉투에 쓰이던 각종 만화와 잡지, 교과서, 소설들을 읽었던 것이다. 사과 봉투는 새 종이가 아닌 한 번 쓰인 종이들로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신문지보다 종이 질이 괜찮았던 것 같다. 만화책은 물론 일본 것이었고, 잡지나 교과서, 소설들 중에는 한글로 쓰인 글들도 꽤 있었다. 집안 이곳 저곳에 굴러다니던 그 종이들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것이 내게 독서라면 독서였다.

나는 1942년 광량만에 있는 금곡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창씨개명을 해서, '강화(江華) 노(魯)씨'인 우리집 식구들은 성(姓)이 '에바나(江華)'가 되었다. 창씨개명된 그때 내 이름은 에바나 도시히코(江華利彦)였다. 교실에서 일본말을 쓰지 않고 우리말을 쓰다 들키면 교사들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해방이 되었다. 얼마 지나 않아 학교의 분위기가 새로워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각 학급에까지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졌다. 4학년이던 나는 학급 '조직부장'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급 반장, 또는 학생회 회장 정도 되었을 것이다. 아마 담임 선생님이 내가 키도 크고 공부도 꽤 잘했으니 시킨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는 곧바로 서울로 내려가셨다. 용강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큰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내려가기로. 이대로 여기서 사업을 이어가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집과 살림을 그대로 두고 부모님과 우리 4남매가 월남했다. 친척들이 살던 평양을 거쳐 기차를 타고 황해도 해주로 왔다. 갓난아기였던 넷째인 여동생 희자는 어머니 등에 업혀왔다. 다섯째인 남동생 만형과 막내 여동생인 재원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해주에서 또다시 우리 식구들은 기차를 타고 황해도 청단을 거쳤다. 38선 다다르자, 미군들이 우리 식구들의 옷 속에 DDT를 뿌렸다. 전염병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큰아버지 노응도(魯應燾)는 미군정 당시 경기도 학무국 시학관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장학관과 같은 직책이었다. 아버지가 미리 서울에 자리를 잡아놓은 덕에 우리 가족들은 정착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곧바로 을지로6가 부근에서 목재 제재소를 시작하셨다. 나는 퇴계로에 있는 일신국민학교 5학년에 다니기 시작했다. 1946년 4월이었다."


중학생 시절의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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