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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18. 2024

환상의 책, 노만 선생님과의 첫 만남

영화사가 노만 2

노만의 영화계 활동과 업적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후반, 이른바 한국영화의 '성장기'와 '중흥기'로 불렸는 시기에 걸쳐있다. 1964년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교재로 발간된 『한국영화사』(한국배우전문학원, 1964)의 첫 페이지에 수록된 <자서(自序)>에 쓰인, 다음의 구절이 눈에 띈다. "한국영화도 그 역사가 금년으로 40주년을 헤아리게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한국영화의 전통을 찾아보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까. 영화계의 활발한 움직임이 '새로운 신인'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배우전문학원과 같은 신인양성소와 대학의 영화과 설치 등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신인 양성에 필요한 텍스트의 빈곤은 또한 악조건의 하나였다." 노만은 이러한 시기, 한국영화의 흐름 한가운데에서 활약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오랜 세월이 지나 잊혀졌다. 그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지난 2020년대, 선생은 영화를 공부하는 후학 연구자들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22년 이후, 나는 노만 선생의 등장과 관련 소식들을 여러 전언으로 들을 수 있었다. 정식으로 출간되지 않고, 수기(手記)의 철필 등사본으로 남겨져 전해 내려온 '환상의 책'. 그리고 그 책을 남긴 저자가,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마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듯한 모습으로 다시 영화계와 까마득한 후학들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의 등장이 실로 영화같은 일이라고 느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본 연재에 착수하게 된 계기를 언급해야겠다. 내가 노만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23년 6월 3일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에서 개최된 한국영화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였다. '한국영화, 위기와 도약의 경계에서: 산업, 정책, 교육의 주요 현안들' 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이날 학술대회가 끝나갈 무렵, 큰 체구의 커다란 안경을 낀 어느 노신사 한 분이 학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학술 발표와 토론이 모두 끝나고 '초대 학회 회원 저서 출간' 소개 자리가 있었다. 그때 노신사분이 연단으로 올라오셨다. 노만 선생님이었다. 연단 앞으로 나온 선생은 마이크를 들고 또렷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학회원들에게 자신을 소개했고, 새롭게 정식으로 출간된 『한국영화사』를 쓰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학회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학술대회 장내가 정리되는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출간된 『한국영화사』(법문사, 2023)를 구입한 몇몇 학회원들이 학회장을 나서는 선생님을 붙잡았다. 즉석 사인회가 열렸다. 몇 사람이 현장에서 판매되고 있던 책을 구입해 선생님께 사인을 받았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검은색 유성매직으로 내 이름과 '魯 晩'이라는 한자 서명을 써주셨다. 큼직한 글씨가 인상적이었다.


2023년 6월 3일 세종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영화학회 춘계학술대회 포스터(왼쪽). 학회원들에게 인사하는 노만(오른쪽).

이후 학술대회 뒷풀이 자리로 이동해 선생님과 마주앉게 되었다. 한국영화사를 전공하는 박사과정 수료생으로 현재 학위논문을 쓰고 있으며, 선생님의 『한국영화사』를 복사본으로 갖고 있고 ... 한껏 들뜬 목소리에 두서 없는 나의 소개가 이어졌다. 선생님은 고요히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내 손을 잡고 활짝 웃으시면서 반가움을 표하셨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라는 노래 있죠? 그 노래에 나오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황영빈이라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명동 휘가로다방에 나올 때마다 노란 샤쓰를 입고 나왔거든. 패션이 독특했지. 그걸 보고 작곡가인 손석우 선생이 그 노래를 지었고, 그게 히트했어."


가수 한명숙의 히트곡인 <노란 샤쓰의 사나이>(손석우 작사/작곡)는 이듬해인 1962년 엄심호 감독, 한명숙 신영균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기 가요였다. 이 노래의 모티브가 된 영화평론가이자 시나리오작가로 활약했고 공보처 직원으로도 재직했던 황영빈(黃榮彬, 1924~1987)은 1950년대 후반 노만이 기자, 편집장으로 있던 잡지 《영화세계》, 《국제영화》, 《스크린》, 《영화예술》의 섭외 필자로 교분을 나눈 사이이기도 했다.


나는 김종원 선생으로 인해 옛 영화계 동료들과 영화연구자 후학들과의 만남을 갖고 있던 노만 선생의 근황을 간간히 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선생이 1935년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내가 1990년생이라는 말씀을 자연스레 드리게 되었고, 이를 듣고 "꼭 손자뻘이구먼!" 하며 크게 웃으셨다. 선생님이 내게 먼저 건네신 악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명함이 없었기에,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그 자리에서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전화번호를 저장, 교환했다.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구매한 [한국영화사]를 넘겨 보면서 카카오톡으로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 두 장을 보았다. 하나는 큰 안경과 모자가 부각된 선생님의 캐리커처 그림, 다른 하나는 그것을 모델이 된 선생님의 사진이었다.

손석우의 <노랸 샤쓰의 사나이>(1961, 비너스레코드)


'환상의 책', 한국영화 키드의 매혹

약 8년간의 기나긴 대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영화사를 공부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2017년 3월의 일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EBS 한국영화특선을 매주 녹화해서 시청하고, 고등학교 때는 한국영상자료원을 출입하기 시작한, '한국영화키드'로 자부해오면서, 영화를 전공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던 초심자 중의 초심자였다. 그때 세운 계획 중 하나는, 여태까지 출간된 한국영화사 단행본을 모두 모아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안종화, 이영일, 유현목, 이효인, 김화, 김미현, 정종화... 저자들의 이름과 함께 목록을 작성했다. 개중에는 절판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도서관에서, 어떤 것은 중고서적으로 책을 곧장 입수했다. 그러나 구해지 못한 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노만의 『한국영화사』였다.


노만의 『한국영화사』의 존재를 처음 접한 것은 이효인의 『한국영화역사강의』(이론과실천, 1992)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의 각주에서 『한국영화사』는 '강의안 논집'으로 명기되어있다. 정식 출판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한국영화사 관계 논문과 연구물에서 이 이름과 책제목을 종종 마주할 수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노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쓴 한국영화사는 무엇일까?


내가 이 책을 마주하게 된 것은 2019년 어느날이었다. 연구보조원 겸 간사로 있던 연구소에서 한 연구원 선생님이 동국대학교 도서관에서 입수한 '복사본의 복사본'이었다. 선배들과 나는 그 '복사본의 복사본'을 복사해 한 부씩 나누어가졌다. 그 책은 마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비서(秘書)'와 같은 모습이었다. 또박또박 직접 손으로 쓴, 빛바랜 오래된 강의록이 주는 신비감이 있었다. 마치 공부 잘하는 옛 학생의 필기노트를 엿보는 기분도 들었고, 그것을 (복사본이나마) 내 손에 넣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갈하고 엄숙했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책은 생각했던 것 보다 꽤 많은 영화연구자들에게 지금까지도 회람되며 인용되어왔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한국영화사』의 복사본. 기실 '복사본의 복사본'의 '복사본'.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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