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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28. 2024

전쟁, 부산 보수동에서의 피난생활

영화사가 노만 10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소년 노만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당장 학업이 중단되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약 3년에 걸친 그의 피난 생활은 부산에서 수복 이후의 서울, 평양, 대구, 다시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졌다. 전쟁 동안 겪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일화들은 소년 시절 그의 감수성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계기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전쟁이 나자마자 아버지는 나와 둘째인 남동생 만원을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서울 집에 두고, 일단 남자들만 가기로 했다. 전쟁 초기에만 해도 서울을 벗어나 피난했던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부산 보수동에 도착하니, 할 일이 없었다. 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하루 종일 보수동 공원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부산항 부두를 바라보았다. 전쟁 물자를 싣고 커다란 배들이 하루에 몇 번씩 계속 오고가는 모습을 보았다. 스칸디나비아 병원선도 들어왔다.

얼마 뒤, 부산에 사는 사촌형님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군정때 경기도 학무과 시학을 했던 큰아버지의 장남인 사촌형님 노만황은 나보다 5~6살 가량 위의 큰 형님이었다. 만황 형님은 육사에 들어갔다가 중퇴한 후 큰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와 미군 부대 인사처에서 한국인 노무자들을 각 부대 배치,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때 총책임자가 갈홍기(葛弘基, 1906~1989) 박사였다. 나중에 그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 시기에 공보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영어에 능통했던 만황 형님은 그곳에서 꽤 일을 잘했던 담당자였던 것 같다. 학교에 갈 수도, 공부를 할 수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도 놀 수도 없었다. 나는 형님에게 미군 부대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형님은 갈 박사를 설득했다. 나이를 물어보는 갈 박사의 물음에 열여덟 살이라고 말했다. 본래 나이를 말했다가는 써주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나이를 높여 말했다. 며칠 뒤, 미군 앰뷸런스(ambulance) 부대에 취직할 수 있었다. 피난해 살던 보수동 집에서 나와 곧바로 부대에 합류했다. 

앰뷸런스 부대는 일종의 '이동식 의무병원'이었다. 전투 중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일을 주로 하는 부대였다. 나는 앰뷸런스 부대에서 각종 잡일을 도맡아 하는 노무자였다. 근무 첫 날, 나에게 주어진 근무 복장은 군복이었다. 특히 내가 속한 부대는 흑인 병사와 장교들로만 구성된 부대였다. 그들 대부분은 문맹에 무학자들이었다. 하루는 그들과 함께 식당에서 어떤 물건 갯수를 세는데, 가로 몇 개 세로 몇 개, 하는 식으로 곱셈하여 갯수를 세자 이들은 내게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한국인 노무자들을 향해 '인종차별'을 전혀 하지 않았고 스스럼없이 잘 대해 주었다.

때마침 남쪽으로 밀리던 전황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9.28 서울 수복 이후 부대들은 북쪽으로 차츰 진격하기 시작했다. 북진이 계속되었다. 부대가 진격하는 대로 열심히 쫓아다니자 월급도 꼬박꼬박 나왔다. 얼마 뒤, 부대는 서울 가까이 도달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집 생각이 났다. 함께 피난을 내려오지 못한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생각났다. 서대문에 왔을 때, 트럭에서 내려달라고 말했다. 그 길로 앰뷸런스 부대 일을 그만두었다."

부산 피난집 담장에서. 왼쪽에서 두번째가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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