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만의 『한국영화사』 등사본. 영화평론가 김종원의 기증으로 한상언영화연구소에서 소장 전시중이다.
"친구 채조병과는 대학 졸업 이후에도 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대학 졸업 이후 해군 장교로 임관했고 그곳에서 중령으로 전역, 이후 서울교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정년 퇴임했다. 그는 경남 진해로 갔고 나는 줄곧 서울에 있었다. 채조병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게 돌려준 편지에는 대학 졸업 직후 막막했던 젋은 날의 내 모습이 담겨있었다. 1959년 1월, 강인순 사장과의 갈등 끝에 《영화세계》를 퇴사하고 한동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잡지 《영화예술》 창간에 참여하게 되었다. 명동에서 마찬가지로 줄곧 알고 지냈던 이영일, 최백산과 내가 주축이 되어 함께 한 것은 맞는데, 편지에 적히 '키 큰 김씨'가 그때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편지에는 영화와 소설 창작을 두고 이래저래 번민하던 모습도 그대로 있다. 극작가 오영진이 감수한 책 『씨나리오작법』(1958)은 황호근이 '한국 최초의 시나리오 작법서'를 표방하고 낸 책이었다. 그 책이 일본에서 나온 시나리오 작법서인 『シナリオ構造論 (시나리오구조론)』을 그대로 베껴 놓은 것을 알았을 때 허탈했다. 시나리오 쓰기와 본격적인 '영화론'을 써볼까 하는 구상도 했었다. 결국 나는 채조병에게 털어놓은 대로 시나리오도 소설도 쓰지 못했다.
1959년은 내게 중요한 일들이 잇따랐던 한 해였다. 우연한 계기로 『한국영화사』의 집필에 착수한 것이다. 『한국영화사』를 쓰기로 결심한 것도 이러한 그 당시 고민 속에서였다. 학부 졸업논문 「씨나리오문학론」을 쓰면서 '한국영화'를 둘러싼 여러 질문을 놓을 수 없었다. 한국적이란 무엇인가. 한국영화의 역사적 흐름과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영화잡지 일을 하면서 여러 자료들을 모았다.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시기 발간된 영화잡지들도 열람했다. 학부 시절 읽었던 김재철의 『조선연극사』(1933)와 백철의 『한국문학사』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아있는 영화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자료'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가 일하던 여원사에 소장된 《동아일보》 축쇄판을 가져다 보았다. 아내의 도움과 배려가 아니었다면 1920년 신문 창간호부터 최근호까지 모든 기사와 광고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신문에 수록된 영화 기사와 광고를 빼놓지 않고 정리해두었다. 나중에 출간되었지만, 안종화의 『한국영화측면비사』(1962)에서도 도움을 받았다.
원로영화인들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특히 이규환 감독과의 만남이 기억에 남는다. 동숭동 낙산(駱山) 산성 꼭대기 위에 살고 있는 이규환 감독의 자택을 찾아갔다. 이규환은 명동에서 보았던 영화잡지 기자인 나를 알아보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 그는 손님 대접으로 설탕을 탄 냉수 한 그릇을 내왔다. 별다른 눈에 띄는 살림살이도 아니었다. 이규환하면 <춘향전>(1955)으로 당대 '흥행 감독' 아니었나. 그럼에도 그때 영화인들의 생활 형편이 그랬다. 일제강점기 시기 나운규와의 활동과 그의 연출작 <나그네>(1937)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한국영화사』출간은 좌절되었다. 아내가 재직하고 있던, 나의 첫 저서를 출간했던 여원사는 물론이고, 을유문화사 등 당대 주요 출판사에서 출간을 타진했다. 모두 거절했다.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원고를 완성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써둔 원고를 《국제영화》에 넘겼다. 1962년 《영화세계》 5월호를 시작으로 총 10회에 나누어 연재되었다. 원고료를 따로 받지도 않고 그냥 주어 버렸다. 앞선 작업들이 있었지만, 긴 호흡을 가지고 대중 영화잡지에 한국영화 역사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최초였을 것이다.
나중에 이영일이 자신의 저작에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을 붙여도 괜찮은지 내게 양해를 구해왔다. 같은 제목으로 출간할 수 없다고 그의 청을 거절했다. 결국 그가 쓴 책은 『한국영화전사』(삼애사, 1969)로 출간되었다. '한국영화사'라는 이름 하에 우리 영화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한 것은 내 작업이 최초였다."
『한국영화사』 집필 당시를 회고하는 노만. 한상언 대표와의 인터뷰. 2024년 5월 1일 서울 공덕동 자택 인근. (유창연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