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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Sep 12. 2024

<쎅스와 고독과 죽음>(1962) ②

영화사가 노만 58

(①에서 계속)


  이러는 가운데 누우드·카렌다가 로스·안젤스의 ‘웨스턴·리토그라프’ 회사에 의해 발매되었다. 그 누우드·모델이 커다란 화제를 일으켰고 한편으로는 그 모델은 바로 몬로라고 수근거렸다. 이에 놀란 폭스사에서는 이 사건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차츰 몬로의 인기가 상승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몬로는 천연덕스럽게도 그 사진의 모델이 바로 그녀 자신임을 성명했다. 먹기 위해선 별 수 업슨 일이었다고 대담하고 솔직히 해명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솔직한 태도에 인기는 더욱 상승하게 되었다.

  몬로가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요 바로 헐리웃이 불경기로 허덕이고 있을 때다. 이러한 누우드.카렌다 사건으로 그녀의 출연 작품은 연일 초만원을 이루는 대성황을 가져왔다. 전화위복— 이 말은 바로 몬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폭스사의 대스타군(群) 베리·그레이불, 진·크레인, 진·피터스, 안 박스타, 쥰·하버 등의 쟁쟁한 멤버를 물리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몬로의 매력은 어느 배우도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맛을 풍기기 시작했다. 바로 <나이아가라>를 비롯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등의 작품이 발표될 1952년부터였다. 마릴린 몬로의 선풍은 세계를 휩쓸었다. ‘몬로·워크’를 비롯하여 풍만한 육체에 도취된 관객은 완전히 몬로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인기에 따라 주급 750딸라가 출연료 10만딸라로 몬로의 주가(株價)는 상승일로에 섰다.

  <쑈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54), <7년만의 외출>(55), <뻐스.스톱>(56) 등의 작품은 모두 몬로의 쎅스.아필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었다. ‘쎅스.아필’이 곧 스타로서의 생명이었다. 몬로와 공연한 케리.그란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몬로는 연기력으로 본다면 그 인기가 턱없이 과분하지만, 성적 매력으로 볼 때는 오히려 부족하다.”

  이러한 평은 정확한 것이었으니, 몬로 자신도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독립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자신이 해보고 싶은 작품에 출연하려고 했다. 그것이 곧 로렌스·오리비에와 공연한 <왕자와 무희>였다. 그러나 그 작품 역시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애정편력


  어린 시절에 받은 충격으로 몬로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결혼을 했지만 그것은 풋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짐·더허티(Jim Dougherty)와의 결혼(1942년 6월)도 일 년 못가서 파탄이 왔고 드디어 46년에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그녀를 이끌어 준 죠니·하이드(Johnny Hyde)와의 사랑은 곧 결실하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하이드가 사망하자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받은 상처가 야구왕인 죠·디마지오(Joe Dimaggio)와의 두 번째 결혼이었다. 디마지오와의 결혼에는 구구한 소문이 많이 떠돌았으나 그녀는 죠를 사랑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1954년 1월 14일 두 사람은 결혼하여 일년도 못가 그해 10월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몬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이 사랑의 파탄으로 인하여 상심한 몬로는 그 후 줄곧 연기 연마에 힘썼던 것이다. 두 사람의 파탄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지성의 결함에 있었던 것이다.

  2년 후 그녀는 세계적인 작가 아서·밀러(Arthur Miller)와 결혼했다. 극작가 밀러와의 결합에 모두 놀랐으나 그것은 또한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죠와의 파탄 이후 몬로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보다도 정신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다 할 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에겐 정신적으로 이끌어 줄 배우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혼도 4년을 지나서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마릴린 먼로와 그의 남편이었던 극작가 아서 밀러

명성과 고독


  ‘성(性)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순종한다’라고 말하고 있던 몬로는 그 실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쎅스의 여왕’이니 하는 말을 가장 싫어한 여배우였다. 비록 성적 매력으로 영화계에 군림했지만 어느 누구에 못지 않은 연기파 배우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여주인공 역을 꼭 하고 싶다고 실토한 바도 있었지만, 그녀는 꾸준히 연기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것은 명성이 높아가면 갈수록 그 생명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더욱이 부리짓트·발도의 출현으로 몬로의 위치는 위태롭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욱이 여배우의 생명은 젊음에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젊은 연기자에겐 이겨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점점 불안과 고독을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몬로는 대배우답지 않게 칼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한편 ‘액터즈·스튜디오’에서 또한 리·스트라스버그의 지도로 연기 공부에 몰두했던 것이었다.

사실 몬로는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했던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그 코스를 밟아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깊은 내용이 담긴 함축성 있는 말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불안한 자신을 숨기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서·밀러와의 결혼이라든지, 연기파 배우로의 전향하기를 꿈꾸는 것 등은 모두 이러한 데서 연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좌절됐을 경우 그녀에게 남는 것이라곤 골수에 스며드는 고독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몬로가 수면제를 자주 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물론 어렸을 때에 받은 타격, 거기에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정신병의 병발에도 있겠지만 이것은 모두 흔들린 사고(思考)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의 자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내 주변의 세계가 싫었어요. 허지만 난 동무둘과 소꼽장난을 즐겼어요.”

  이러한 혼돈될 사고의 세계에서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성격이, 몬로를 죽음의 세계를 이끌게 한 커다란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몬로는 그녀의 사인(死因)에 대해서 수수께끼를 남기고 죽었지만 한때 전세계를 풍미한 그녀의 쎅시한 매력은 오래토록 우리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한번 한국의 땅을 밟고 잠시나마 그녀의 모습을 우리에게 비친 일이 있었다. 그것은 1953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날이었다. 한국에 와있는 미군을 위문차 군복 차림으로 미 제5공군 사령관의 전용기(轉用機)를 타고 여의도 공항에 내렸을 때 세겹 내겹으로 그녀를 둘러싼 장병들의 환영을 물리치기에 헌병들은 진땀을 뺐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서도 ‘몬로 선풍(旋風)’이 불었다.

  더욱이 작년 5월 19일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축하 파티에서 그녀는 ‘해피·버스데이’를 노래 불렀다. 이 생일 축가를 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몬로 양이 내 생일 축가를 불러주었으니 나는 이제 정계(政界)를 떠나도 한이 없다’고 만족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성(名聲) 속에 살았던 그녀, 그러나 그녀는 고독하였던 것이다. (영화평론가) 

마리린·몬로의 발언록(發言錄)

☆ “끝장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해방일는지는 모르죠. 그건 마치 우리가 무슨 경주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뛰고 놀다가 꼴인하면 하여튼 끝났다는 것과 비슷할 거에요.”
☆ “명성이라는 것은 나에게 일시적이며 부분적인 행복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명성을 끼니를 먹듯이 누리는 것은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 “나는 행복에 만성이 되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한 일이 없다.”
☆ ”나는 소위 성의 상징이란 말을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상징이란 말을 들을 때 언제나 그 어떤 물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이 몹시 싫다.”
☆ “사람이란 것은 유명하게 그 결점이 과장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계는 막 자동차 앞으로 내닫는 어린이를 취급하는 듯 배우들의 결점을 취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이를 꼭 붙드는 대신 매질을 하니 될 말인가.”
☆ ”명성이 나에게서 떠나간다면 나는 잘 가거라 작별인사를 하겠어요. 나는 명성이라는 것이 변덕장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연연하지는 않을 거에요.”

(잡지 여원 1962년 9월호(통권 85호), 여원사, 1962, 184~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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