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dventureJIEUN Aug 13. 2019

깻잎이 뭐길래

할머니,깻잎, 나. - 브런치X한식문화 참여

깻잎 - @photoAC

 "밭에서 깻잎만 봐도 '아이고 우짤꼬, 우리 지은이가 요 깻잎도 못 먹고 잉' 하는데."

할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면 항상 하는 말이 비슷하다. 매주 전화를 드려도 결론은 항상 밥 잘 먹고 다니냐, 배곯지 말고 다녀라, 음식은 먹을 만 하나, 김치 좀 보내주고 싶다, 깻잎지 담가서 보내주면 안 될까. 특히 할머니가 밭에서 일하다가 내 전화라도 받으시면 지금 밭에 난 깻잎이 얼마나 실했는지, 얼마나 향긋한지, 내가 얼마나 깻잎을 좋아했는지를 말씀하신다. 깻잎만 봐도 내 생각이 절로 나서 보고 잡다고 하신다.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그 깻잎을 보면서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 괘씸한 손주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셨으리라고.

 나는 깻잎을 참 좋아한다. 일요일 저녁에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으면 항상 할머니 텃밭에서 깻잎이 나왔다. 그렇다고 깻잎으로 쌈만 싸 먹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는 커다란 양푼에 고춧가루, 액젓, 간장, 다진 마늘 각종 양념을 넣어서 빨간 양념장을 만들고, 그 양푼을 다리사이에 끼고 앉아 한 장 한 장 양념을 묻혀 만든 깻잎지는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특히 누룽지와 함께 먹을 때 그 향은 온 입안에 퍼진다. 또 밀가루 반죽에 담갔다 겉이 바삭하게 구워진 깻잎전은 얼마나 고소했던가! 그럴 때면 방에서 컴퓨터를 하던 남동생도, 안방에 누워서 티브이를 보던 엄마와 아빠도 모두 다 그 고소한 냄새에 홀려서 거실로 주방으로 나와서 거들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여린 깻잎순을 따다 말리거나 혹은 살짝 데쳐 무친 깨나물이다. 부드러운 애기 깻잎 뭉치 같아 보이는데 시금치 무치듯 어글어글 버무린 그 깨나물은 도저히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집만의 으뜸 나물이었다.

 내가 얼마나 깨나물을 좋아했던지, 대학교 근처에 자취할 때, 할머니는 깨나물을 종종 챙겨주셨다. 손은 어찌나 크시던지 집에서 가장 큰 반찬통을 꺼내서 깨나물을 꾹꾹 눌러 담아 그 양은 우리 가족 모두가 다 같이 일주일은 거뜬히 먹을 양이었다. 내가 혹시라도 두고 갈까 자취방으로 가는 날이면 가방 속에 미리 넣어두셨다. 그렇게 가지고 온 깨나물은 자취방 냉장고로 직행이었다. 자취를 해본 사람은 예상하겠지만, 처음에는 열심히 가지고 온 반찬으로 친구들을 불러다가 밥도 해 먹고 요리도 해가면서 반찬을 먹다가 점차 배달 음식, 편의점 음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다 이것도 지겨워 문득 집밥이 그리워 질라 치면 다시 밥을 해 먹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렇게 결심의 반복 끝에 나도 결국 밥을 했다.

2014,2015년도 친구들과 모여서 해먹었던 진수성찬급 집밥. 여러집에서 온 반찬들.

 그때도 어김없이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에서 밥을 해 먹었는데, 그때 냉장고 속 모든 반찬이 다 나온 것 같다. 계란말이도 하고 아삭하게 잘 익은 총각김치도 꺼냈다. 서산이 고향인 친구의 마늘장아찌와 멸치볶음,  온양 친구의 배추김치와 감자조림. 그리고 가져온 지 얼마 안 된 깨나물도 꺼냈다. 그리고 밥 뜸 드는 냄새가 방안에 퍼질 때, 나는 반찬 뚜껑을 열고 수저를 놓았다. 그러다 깨나물에서 쉰내가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 한입 밖에 못 먹은 깨나물이었는데, 따신 날의 온도가 깨나물을 먹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물은 쉽게도 상한다. 깨나물이 상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다.

 이걸 다 버려야 한다니.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가 없었다. 먹다가 조금 남은 것도 아니고 거의 한 통 전부를 버리게 생겼다. 그냥 상한 음식이고, 상한 음식 그냥 쓰레기 봉지에 넣어 버리면 되는 쉬운 일이다. 근데 그때 그걸 버리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던지. 자취하는 손주 온다고 밭으로 나가 여리고 여린 순들만 따서 조물조물 맛있게 무쳐서 흐뭇해했을 할머니의 모습이 그 깨나물에 오버랩돼서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할머니에게는 그 날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울고 나니 할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전화를 했고, 할머니의 깨나물이 얼마나 맛있었고, 친구들이 얼마나 좋아했었는지에 대해 거창한 거짓말을 했다. 전화기 넘어 속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넘치는 애정과 뿌듯함이 묻어있었고, 다음에 오면 이번에는 깻잎지를 담가주겠다는 말을 전했다.

 깻잎이 뭐길래. 할머니가 해준 반찬이 뭐길래. 음식이 뭐길래. 5년이나 지난 반찬을 버린 이야기가 내 마음속에 아직도 자리 잡혀 있을까. 미국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할머니의 깻잎이 그립고, 깻잎지가 그립고, 깻잎전이 그립고 깨나물이 그립다. 사실 미국에서 한인마트 외에는 깻잎을 구하기가 어렵다. 특히 내가 사는 이곳은 한식당도 테이블 5개 남짓한 작은 가게로 딱 1개만 있는 곳이며 한인마트는 2시간 30분은 달려서 다른 도시로 가야한다. 나는 이 추억을 곁에 두고 먹고 싶어서 아마존에서 약 7불짜리 깻잎 씨를 샀다. 이제 이 깻잎을 키우면서 할머니와의 전화통화의 주제가 바로 이 깻잎의 성장과정이 될 것이다. 이미 씨를 샀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벌써부터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옴방한 화분은 또 무엇인지 장황한 설명을 해주시며 나처럼 들뜨셨다.

 도데체 나와 할머니에게 깻잎은 무엇일까. 그냥 단순한 음식 재료는 아닐 것이다. 집밥이라는 테두리에 항상 들어갔던 단어, 깻잎. 만약 모든 단어에 온도가 있다면 우리에게 깻잎은 따뜻한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