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리다
The Night in Seoul 비 오는 날 잠수교The Night in Seoul 비 오는 날 잠수교
The night in Seoul (서울의 밤_ 1편) 비오는 잠수교
비가 거세게 오는 날 잠수교의 아슬함이 좋다
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물살이 세지는 강물에
사방에 흩어지는 빗물에...난리도 아니지만,
이 와중에 용감하게 자전거 타는 사람도
쫄쫄이 입고 달리는 사람도
차를 세우고 멍때리는 나도
다꼬야끼를 파는 아저씨도
모두가 아슬함을 즐기며, 잠수교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가장 아슬한건 이 친구들이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친구 둘이 오픈카……(우정 클라스)
장마철마다 잠기는 이 다리는 평소에는 한강의 가장 나즈막한 곳에서 길을 내어준다.
이곳에서는 강남출신인지 강북출신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강남과 강북 경계 어딘가에서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작은 안식처 같다.
부의 안식이고, 박탈의 안식이고, 일상의 안식이다.
잠수교에서 나는 굳이 파리에서 칼리와의 키스를 곱씹는다거나
런던에서 크리스틴과 격렬한 스킨십의 추억을 꺼내고 싶지 않다.
파리의 단촐하지만 욕심쟁이 같은 다리들이나 역류하는
바다물과 템즈강 사이에 우쭉선 런던의 다리들이나 다 그곳에서의 추억일 뿐이다.
한강 정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서 위치해
일상에 지친 나같은 방황자들에게 길이 되어주는 잠수교는 나름의 추억들이 다리 번호에 새겨져있다.
잠수교는 경이나 영이, 숙이와의 추억이 잘 맞는다.
음악은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어울린다
아무도 없는 텅빈 잠수교에서 사방에 비바람이 불고, 쓸쓸하고 고독한 감정이 곁들여지면, '이소라'의 목소리는 모든 감정을 터트리는 시한폭탄이 된다.
비 오는 잠수교는 터벅터벅 구두 뒷창이 다 닳아 희망의 갈피를 못잡는 취준생이나,
헤어진 아픔의 상처를 수습하지 못한 사람들의 미련이나, 소시민들의 한숨과 무드가 맞는다.
아무 생각없이 도시를 가로질러 뛰고 싶거나,
사람들의 극혐반응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엔진소리를 극대화시키는 바이크 족들이나,
자전거로 느긋한 저녁의 공기를 마주하고 싶거나,
사사건건 트집잡고, 문구하나에도 완벽주의자인척 비아냥대는 상사의 공격에서 잠시 위로받고 싶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도망치고 싶거나...
사랑에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 아프지도 않은 무생물적 감정을 어디엔가 비비고 싶거나,
비오는 밤의 잠수교는 조용히 다 받아준다.
그리고 이건 찐인데, 32번 31번 사이의 낭만을 아는 사람들이 진짜 잠수교를 아는 사람이다.
비 오는 날 나는 잠수교를 그냥 걷는다. 그냥
토이의 A night in Seoul을 듣거나 1975의 Somebody else를 들었다
여기에 한때 사랑했던 친오가 "오빠 오늘 드라이브는 내 일생에 최고였고 완벽했어."라고 말한 그날의
플레이리스트를 얹혀본다.
비 오던 그 날 밤, 차 안을 넘어 잠수교 조차 가득채웠던 한 곡의 음악이 모든 추억을 휩쓸어 버린다.
내가 흘린 기억들이 창문 틈새로 빠져나가 잠수교 어딘가에서 흘어져, 그의 추억들과 만난다면 좋으련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는다. 비오는 잠수교의 로터리를 맴맴돌다 만지작 거리던 휴대폰을 주머니로 집어넣고, 한강도 나도 제 갈 길을 간다.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