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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MEE Jun 13. 2021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

20대, 그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추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움이란 단어에는 설렘과 기대가 함께 담겨있다. 





새로움이란 단어에는 설렘과 기대가 함께 담겨있다. 나는 새로움에 열려 있는 편이다. 물론, 익숙하고 편안한것도 좋지만 이내, 새로운 것에 눈길을 돌리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정절에 달했던­ 20대는 가장 유연하게 사고(思考)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세상이 궁금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귀며 의식을 확장해갔다. 마치 내가 세상을 향해 두 팔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돈도 없고 지식도 부족했지만, 짠내나는 배낭여행과 사람사귐을 통한 배움이 즐거웠고 생각을 풍­­­­­­요롭게 했다. 생에 첫 해외여행이자 체류도 그렇게 새로움을 쫓아 시작되었다.



   2003년 스물세살이 되던 해 대학 4학년 2학기를 남겨놓고 휴학을 했다. 졸업 후 진로도 정해야 했고, 스펙도 쌓아야 했는데 그보단 평범했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세가지 모두를 아우르는 최적의 선택은 ‘해외자원봉사활동’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NGO를 찾아보다가 ‘인도’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O국제구호단체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해 7월, 인도 둥게스와리에 갔다. 



   둥게스와리는 ‘버려진 땅’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신 정전각산이 있어 성지순례지로 유명하다. 지명처럼 이 척박한 마을에서 사람들은 돌산에서 돌깨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성지순례자들에게 구걸하며 살아왔다. 이런 곳에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고 마을개발사업을 통해 일자리가 생겨났다. 누구라도 배울 수 있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정갈하게 머리를 빗고 학교에 왔으며, 먼 마을 아이들은 하루에 두 번 가파른 돌산을 넘었다. 아픈 사람은 누구나 진료받을 수 있으며, 결핵환자는 약값 걱정을 안하고 치료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결핵환자 돌보는 일을 하게되었다. 병원행정과 약품관리, 결핵환자 영양식 지원이 주된 업무였고, 먼저 와있던 선임 활동가와 함께 일하며 배웠다. 한달 후면 선임이 떠나고 오롯이 혼자 해야했기에, 제대로 업무를 해내려면 빨리 현지화되어야 했다. 선배들로부터 내려온 ‘힌디어 족보’를 교과서 삼아 서바이벌 힌디어 기초를 공부했다.(영어보다는 힌디어 공부를 해갈 걸 그랬다.) 40도 이상의 무더위와 음식에도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잠시 경험하는 것과 적응은 반대의 개념이었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 더위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땀구멍이 열리고, 하루에 점심 한끼를 학교 급식(주로 감자를 넣는 커리로 내가 먹어오던 한국카레와는 다른 음식이었다.)으로 먹을 수 있게 되는데는 딱 한달이 걸렸다. 다행히도 아픈 곳은 없었지만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며 체력적 한계에 부딪힐때쯤 서서히 적응이 되었다.



    학교 리더들이 수업을 마친 오후에는 통역과 업무지원을 해주어 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솔직히 아이들과 금새 친해져서 힌디어를 배우고 수다떨며 우정을 쌓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때도 있었다. 함께 일했던 리더는 맑은 미소를 가진 미라란 아이였다. 5학년으로 제법 숙녀티가 나는 소녀였는데 결핵약을 복용하는 환자이기도 했다. 6개월 남짓 단기로 활동하고 떠나는 자원봉사자를 보면서 자신도 장래에 누군가를 가르치고 돕는 일을 하겠다는 꿈을 꾸는 소녀였다. 우정이 깊어질수록 물질적 풍요와 일찍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것, 배울 수 있음과 한국사회에서 태어난 것에도 감사함을 느꼈다. 자원활동가에 대한 이들의 환대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경험한다면, 누구나 속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리라.


   

일과를 마친 후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미디어와 술에 간섭 받지 않는 밤, 매일 옥상에서는 오롯한 청년의 밤이 시작되었다. 기타와 노래가 있고 쏟아지는 별과 그날의 에피소드로 가득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한국에서의 이야기도 빠질수 없었다. 실없는 농담으로 시작해 정치・사회문제로 이어지는 담론과 우리의 미래, 어떤 사람이 될지 무슨일을 할지, 어떤 공부를 할지로 생각이 깊어지는 새벽이 찾아왔다. 하나 둘 방으로 돌아가고 몇몇은 옥상에 남아 아침이슬을 맞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면서 문명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서 깨어있는 행복함을 느꼈다.



   지금 나는 어떠한가?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 좋아 주로 만나던 사람과만 만나고 자주들르는 식당과 카페가기를 선호한다. 여행도 편안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보장된 숙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궁금함 보다는 돌봐야 하는 아이에게 관심이 집중한다. 돈을 벌어서 소비하는 삶에 익숙하고, 아이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데 그 역시 물질적 풍요안에서 가능한 것들이다. 달콤한 풍요와 안락함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20대, 그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추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물셋, 그때 확실했던 것은 휴학생이란 불확실한 신분뿐이었다. 그렇지만 평범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나를 놓아둔 그 시도 덕분에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는 보석같은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 다시 질문을 시작한다. 독서로 넓은 세상과 현자를 만나며 그들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잘 살다가 갈 것인가? 가족을 중심으로 울타리쳐진 내 인식을 넓히는 일, 사색과 글쓰기로 내 생각을 펼치는 일을 하고 싶다. 마냥 새로운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내면을 채우는 행복추구는 누구라도 쉽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독서와 글쓰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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