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별명은 ‘갓채윤’이었다. 수능 다음 날에도 수능 오답 노트를 작성하지 않았냐는 농담을 들었을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했다. 스터디 플래너에는 날마다 나를 채찍질하는 말을 썼고, 꿈에 대한 희망보다는 실패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을 원동력 삼아 경주마처럼 달렸다. 보이지도 않는 수많은 경쟁자를 상상했고 나는 무조건 그들보다 열등하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워 있고만 싶은 나의 모습을 대변한 트윗
그렇게 한 열정 했던 내가 ‘취업 준비를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다들 좀 대충 살라고, 당신들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남들이 앞서가는 것을 보고 열등감을 느끼고, 그것을 연료 삼아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는 전투 의지를 아주 상실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 합격하더라.’ 인턴사원으로 취업하기 위한 꿀팁을 전수해준다는 특강에서 들은 말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절벽으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기분이었다.
뒤처지는 기분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열정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화만 치밀어 오르고, 답도 없이 회사 탓, 사회 탓만 하는 나 자신이었다. 이것이 내 마음이 지쳤고 힘들다는 신호인지, 아니면 그저 취업 준비가 귀찮아서 무작정 미루고 싶은 철없는 마음인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도대체 고등학교 때는 어떻게 열 시간이나 공부를 한 거지?
“언니, 제 인생을 잘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보고 싶고 그리울 겁니다.”
출판사 창비의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는 여성 창작자들이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뉴스레터다. 정세랑 소설가 김인영 음악감독에게, 김겨울 작가는 허난설헌 작가에게, 김정연 만화가는 미야베 미유키 작가에게 존경과 애정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거나 다른 공간과 시간에 살았던 멋진 ‘언니들’의 이야기는 소소한 위로가 되었다.
위 문구는 니키 리 작가의 편지에 있던 말이다. 그는 열 살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를 썼다. 그는 시골 유지였던 외할아버지의 생신 잔치에서 봤던 기생 언니들을 떠올리며, 그들 덕분에 예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언니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지만,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이 니키 리가 예술가로서의 삶을 지속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내 인생을 잘 살아줘서 고마워." 열 살의 나도 스물네 살의 나를 보면 그런 말을 할까 생각해봤다.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했던 나는 어려운 순간에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집 앞 놀이터에 나가는 것도 싫어했던 집순이에서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졌다. 스물네 살의 나는 열 살의 내가 꿈꾸던 어른의 모습에 가깝다.
변하지 않았기에 열 살의 내가 더 좋아할 것 같은 부분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똥고집’이 있다. 겉만 놓고 보면 모범생 같았지만, 남들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은 적성에 영 맞지 않았다. 내 인생 최고로 열정을 발휘했던 것도 누군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잠과 싸우며 공부하는 건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내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을 즐겼다.
지금의 나는 그 성취감을 잊었다.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에게 화가 났던 건, 옛날만큼의 열정이 없었던 건, 스펙이 부족해서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였다.
테드 창의 단편 ‘숨’에는 주인공이 자신의 뇌를 직접 해부하며 그 구조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소설을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번으로 꼭 2년째 연재하게 된 이 에세이 시리즈 ‘학교에서 생긴 일’을 다시 읽고 있자니 소설 속 장면처럼 나의 뇌를 해부해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들었다. 에세이 한 편 한 편은 내가 얼마만큼 심리학을, 예술을, 나를 사랑했는지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나는 잊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처음 아트인사이트에서 에디터로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때부터 ‘나를 사랑하는 법’을 고민했다. 2021년 8월, 스물네 살의 나는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나의 목소리를 계속 듣는 것. 나의 삶을 잘 살아줘서 고맙다는 열 살, 열아홉 살의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불행할 것이 뻔한 선택을 하며 후회하지 않는 것.
그러니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어야겠다. 분명 내가 쓴 것이 맞는데 뇌의 주름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지는 그 글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