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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즘 Aug 10. 2019

한국어와 영어 사이

0개의 언어를 하는 여자의 이야기


월요병을 느끼며 지난 주말 동안 온 이메일을 살펴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담당하고 있는 고객사에게 걸려온 전화로 생각해 무심코 전화를 받을 뻔했다.


“???”


수신인에 찍힌 대표님의 이름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대표님이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거신 건 처음이어서 적지 않게 당황했다. 사원인 나에게 대표가 전화할 경우는 0 확률에 가깝기 때문이다.


글로벌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할 건데 나를 업무 담당자로 지정하시고 싶다고 했다. 주요 업무는 본사 HR, APAC 담당자와 업무 조율을 하고, 국내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종종 있을 콘퍼런스 콜에 참여하면 된다고 하셨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맡아하시던 분이 최근 퇴사를 했는데,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한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해외지사에서 근무를 해보고 싶기 때문에 본사 HR 담당자와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어에 대한 부담감이 날 짓눌렀다.


난 유학생이다. 학부는 미국에서, 석사는 한국에서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어 좀 한다는 애들이 입학하는 신방과를 전공했다. 그런 내가 영어에 대한 부담감은 한국에서만 공부한 사람들 못지않게 크다. 난 영어가 나의 큰 약점이라 생각한다. 유학생이기 때문에 받는 시선이 늘 부담스러웠다. 어디 가서 유학생이라 하면 “영어 진짜 잘하겠다”, “원어민처럼 할 것 같은데”, “영어발표는 식은 죽 먹기 아닌가”, “공부 안 해도 토익 990은 맞아야지”와 같은 얘기를 늘 들었다. 그때마다 웃으며 넘겼지만, 난 사실 한국인 앞에서 영어 할 때가 가장 무섭고 스트레스받는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4-5년 정도 살았다고 하면,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할 거라 생각한다. 내가 언어발달 시기인 초등학교 혹은 늦어도 중학교 때 유학을 갔더라면 남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영어를 잘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영어를 잘한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영어를 잘하는 기준은 영어로 문장을 생각하고 문법과 단어 선별에 대한 고민 없이 그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한국어로 먼저 문장을 생각하고, 그 문장을 영어로 번역해 말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고민을 한다. 그리고, 문맥에 맞는 적절한 단어와 올바른 문법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영어에는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영역이 있는데, 그중 영어 읽기, 쓰기, 듣기는 내가 잘하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학부시절 수많은 에세이와 기사 작성 과제를 하다 보니 영어를 읽고 쓰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성장했던 것 같다. 석사를 국내에서 하긴 했지만, 수많은 논문을 읽고 졸업 논문을 작성하다 보니 읽고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누군가 한-영, 영-한 번역을 부탁하면 크게 품을 들이지 않고 해 줄 수 있는 정도라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말하기는 너무 어려운 영역이다. 몇 달 전, 해외 지사에서 온 손님의 강연을 기획하고 사회를 볼 일이 있었는데, 그 한 시간의 강연이 나에겐 퇴사를 생각할 만큼 큰 부담이었다. 학부 졸업 후 한국에 돌아온 지 만 5년이 되어가고 그동안 영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었다. 기회가 줄어들수록 영어 실력도 줄었고, 영어 실력이 줄어든 게 느껴질수록 영어로 대화하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


“회사에서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롱런하는 것 같다더라. 학생 때는 영어를 잘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었다면, 직장생활에서는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위너라는 거지.”


이런 내 고민을 익히 알고 있던 친구는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난 그 말을 듣고 무언의 공감을 했다 (참고로 이 친구는 한국에서 모든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아 왔고 현재 공기업에 재직 중이다). 회사마다 업무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의 말을 일반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게 영어로 쓰는 것 보다 훨씬 어렵다. 회사에 들어와서 가장 스트레스받았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장문의 보고서를 국문으로 쓸 때 였으니까. 한 번은 친구한테 리뷰를 봐달라 요청했는데, 그 친구는 한숨을 쉬며 “번역체가 너무 많아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며 독설을 날렸다.


나에게 한국어와 영어는 모두 불완전한 언어이다. 한국어로 글을 쓸 때는 마치 영어 어순과 비슷한 번역체를 많이 쓰고, 영어로 말을 할 땐 버벅거리고 글을 쓸 땐 한국식 표현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한국어와 영어를 배우는 중이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걸음마하듯이. 단어가 생각이 안 나면 우리말 사전을 들여다보고, 가장 적합한 표현을 쓰기 위해 구글에서 비슷한 용어가 나온 뉴스를 검색해본다. 가끔 문장을 영어, 한국어 둘 다 작성한 후 구글 번역과 파파고를 반복해서 돌려보기도 하고, 부산대 맞춤법 검사기를 통해 맞춤법과 띄어쓰기 검사를 하기도 한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도 국문으로 글 쓰는 연습을 하고, 이 어색한 문장체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언어는 환경과 반복적인 학습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영어를 배우겠다고 한국어를 쓰지 않으니 모국어를 잃어버린 상황에 놓이기도 했고, 한국에서 영어를 쓰지 않는 환경에 있다 보니 배운 영어를 잊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요즘 수백만 원 하는 영어유치원에 자녀를 보내는 기사를 본 적 있다. 배움에도 때가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모국어를 완전히 익히기 전 영어를 배우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싶다. 언어발달이 다 된 성인도 두 가지 언어를 쓰다 보면 언어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곤 한다. 한 가지 언어라도 잘하도록 교육하는 건 어떨까.


* 언어 UX에 대해 궁금하다면, 필자가 쓴 <업무에도 언어 UX가 필요하다> 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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