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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 Sep 23. 2023

#5 교통사고처럼 불쑥 찾아온 불편함

 오늘은 어제 스포르체스코성을 나오며 본 미술관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트리엔날레 미술관에나 갈까, 하고 친구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늘은 날씨도 꾸리꾸리 하고 우리 둘 사이의 공기도 뿌옇게 흐렸다. 우리는 어제 로마 여행을 계획하다가 조금 다퉜다.


어제 싸운 이유는 로마 관광 동선 때문이었다. 우리는 동네로 돌아와 같이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서 여행 계획을 짰다. 밀라노에서 피렌체와 로마를 하루씩 머물다 오기로 하고 미리 기차표를 끊어놓은 상태였고 이제 구체적으로 관광지를 찍고 동선을 짜기로. 그런데 로마 바티칸 시국과 콜로세움을 포함한 여러 유적지를  하루 만에 다 보려면 기차 시간을 맞추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가 미리 기차표만 대강 예매할 땐 생각지 못한 거였다. 난 이미 여행지를 다 가봤다는 친구가 별 말이 없으니 일정에 무리가 없겠거니 생각했고, 친구는 모처럼 한국에서 여행 온 나에게 모든 걸 맞추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환불도 안 되는 이탈리아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두었는데 이제와서 계획을 짜고 뭐 동선이 꼬이니까 골치가 아팠다. 이때 난 기차 시간에 맞춰 아쉽지만 무언가 포기하든가, 환불이 불가능한 표를 버리고 새로 기차표를 사든가 선택해야 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일정이랑 동선을 짜봤다. 그런데 내 앞에 앉은 친구는 이미 기분이 상해있었다. 기차표를 예매한 뒤에 계획을 짜고 있는 상황에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허허.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오늘 우리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평소 무심한 편인 나도 좀 짜증이 날 정도로 친구는 말도 없고 내가 하는 말에 자주 대꾸도 안 했다. 그리고 내 말이 안 들리냐, 왜 내 말에 대답 안 해주냐고 물어보니까 내 말소리가 작다는 둥 혼잣말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된다는 둥… 어이없고 기분 나쁜 말만 돌아왔다. 옆에서 떠들고 있는데 무슨 말이야. 다시 생각해도 화가 부글부글 끓는다. 그렇게나 다양하게 내가 불편하다는데 나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고, 세심하지 못한 내 성격이 이렇게까지 상대방을 답답하게 하고 서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어제의 땐땐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오늘 오후에 다시 감정이 불거졌다. 일단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말 없이 혹은 필요한 말만 몇 마디 주고 받으며 카페와 피자 맛집을 찾아 걸었다. 친구는 자꾸만 계획이 없는 내게 “어떡할래?” 하고 말했고, 딱히 계획이 없던 나는 ‘우리 이제 뭐할까? 어디갈까?’가 아닌 ‘넌 이제 뭐하고 싶냐’라는 뉘앙스가 불편했다. 아니 뭘 어떻게 해? 난 길만 걸어도 좋고 배고프면 아무 데에나 들어가도 상관이 없는데, 무슨 일정 하나만 끝나면 나보고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정말 미치겠는 거다. “피자 먹어도 되고 집에 가서 밥 해먹어도 되고~!” 하고 말하면 “피자 먹으려면 이쪽으로 가야 하고 집은 저쪽” 이런 식으로 또 나에게 선택의 의무가 주어졌다. 심드렁한 표정과 말투에 자꾸 그런 식으로 내가 내 할 일을 안 하고 있다고 나무라는 듯한 친구의 태도가 싫었다. 친구가 내 계획에 자기 일정도 맞추려는 생각이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자꾸 나한테 선택을 강요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친구가 찾은 피자 맛집에 가기로 했다. 여긴 점심과 저녁 장사 사이에 꼭 브레이크타임이 있어서 저녁 먹기에는 애매한 오후를 카페에 앉아 한 시간 넘게 보냈다. 함께 마주 앉아 있었지만 따로 시간을 보냈다. 난 챙겨 나온 책을 읽었고 친구는 자기 폰을 들여다보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게다가 서로 허심탄회 하게 무언가 털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소소하고 뾰족한 말들, 무언의 시간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다 덮어버리고 피자를 먹었다. “피자 맛있다~” 하는 건조한 감탄사만 나누다 하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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