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운동장. 단짝 친구 커로우와 위에전은 그늘에 앉아 눈을 감고 미래를 그려본다. 짝사랑하는 장스하오를 떠올리며 행복한 상상을 하는 위에전. 그에 반해 커로우의 눈앞은 캄캄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답답한 기분. 그런 커로우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에전은 커로우에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부탁한다. 그러나 웬걸, 장스하오는 오히려 커로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만다. 성별을 구분하고 연애를 금지하는 학교라 그럴까. 마음속 감정을 표현하는데 아직은 미숙해서 그럴까. 수습도 해명도 쉽지 않고, 이해와 납득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게 풋풋한 바람이 세 사람 사이로 복잡하게 불기 시작한다. 싱그러운 향기가 묻어있는지도 모른 채.
# 푹푹 찌고 습한 건 휘발돼
“여름이었다.” 이 담담하고 짧은 문장이 밈처럼 퍼졌던 때가 있었다. 글 말미에 붙이기만 하면 아련함을 만들어주는 마법의 문장. 엉터리 요리를 살려주는 라면 스프 같은 필살기일까. 중구난방 맥락 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별 의미 없는 SNS 포스팅이더라도, 여름이었다는 되뇜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길지도 않은 이 다섯 글자에 대체 무슨 힘이 있길래.
뜨거웠던 시간을 버텨 낸 가을 어귀에 서서 여름을 생각해본다. 시원했던 물놀이, 도란도란 나눠 먹던 화채, 차가운 샤워와 거실 바닥 냉기로 잠이 들던 그날 밤까지. 더위의 무서움은 어느새 휘발되고, 이에 맞섰던 추억이 남아있다. 분명 숨 막히는 열기로 가득했었는데, 계절은 청량함으로 가득 찼다. 신기하다. 단어의 이미지는 본래의 속성 너머 우리의 이야기까지 포함하나 보다. 그래서 그 옛날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렇게 애틋한 걸까. 당시엔 무척이나 캄캄하고 혼란스러웠었는데 말야.
영화 <남색 대문> 역시 관객에게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커로우는 도무지 밝은 미래를 그릴 수 없어 걸음을 떼지 못하고, 위에전은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없어 돌발행동을 반복한다. 거기에 순수함과 단순함의 경계를 오가며 직진으로 올인하는 장스하오까지. 영화는 답답하고 서툰 모습 뿐이라 어쩌면 우리의 눈을 질끈 감게 할지 모른다. 그런데 희한하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걔(장스하오) 수영하는 소리는 들린다”며 설레는 표정과, “난 전갈자리, 기타클럽, 수영부”라고 자기소개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순박함. 영화는 이들의 풋풋함으로 가득하다. 땡볕 더위를 이겨내느라 자신들의 파릇함을 모르기에 더 애틋히다. 우리도 그랬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이.
# 남아있는 것이 미래를 만들어
이처럼 한 발짝 물러서서 기억 너머를 떠올리면, 그 시절의 고유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혹자는 이런 심리를 일부러 즐거운 기억만 선별하는 ‘므두셀라 증후군’이라 진단하기도 한다. 순수했던 지난 날을 도피처로 삼아 곤궁한 현실을 잊으려는 방어기제라고. 그런 의도도 일부 있긴 하겠지. 하지만 정말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동경하는 마음뿐일까. 빛깔을 잃어버린 어른에게 투여하는 순간의 마취제뿐인걸까. 그럼 너무 허무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걸.
물론 십대 후반과 여름이 만나면 시작부터 만들어지는 정서가 있다.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는 푸른빛이 촉촉하게 적셔준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관객에게 의미가 있다. 엄청난 치트키야. 그러나 영화 <남색 대문>은 단순히 그 힘에 기대지 않는다. 추억보정으로 에너지를 채울까 하고 영화의 문을 열었지만, 기대했던 피톤치드향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다. 오히려 아이들의 여름을 날 것 그대로 비추며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땀냄새를 담아낸다.
장시하오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쓰레기통의 물건들만 뒤지는 위에전. 초라한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서럽다. 단호해 보이는 커로우도 속앓이하는 건 마찬가지.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체육관 담벼락에 벅벅 외치는 낙서뿐이다. 오해 덕분에 시작부터 엇갈려버린 장시하오의 마음은 또 어떤가. 다가가면 멀어지는 커로우를 붙잡을 수도 떠나보낼 수도 없다. 참 요상해. 향수를 자극하는 순수한 추억팔이보다, 아이들의 복잡한 표정이 내 손을 더 붙잡고 있단 말이지. 아마도 수십년 전 어디선가 봤을 얼굴이라 그럴지 몰라.
영화는 과거를 마주하는 어른의 심경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화 중반, 오랜만에 엄마 옆에 누워 잠을 청하는 커로우. 그리고 나지막히 ‘아빠가 떠났을 때 어떻게 버텼냐’며 ‘나도 금방 괜찮아지길’ 바란다고 털어놓는다. ‘그냥 견뎌냈다’고 흘리듯 얘기하는 엄마. 이때 화면은 위로받는 커로우가 아닌, 슬며시 눈을 뜨는 엄마의 표정에 집중한다. 성장통을 겪고 있는 딸의 모습에 내심 흐뭇함도 스치지만, 그 너머엔 아직도 작은 싸움들이 남아있는 얼굴. 어른이 되었고, 누군가가 내게 조언까지 구하고 있는데. 나의 오늘은 그 시절의 바람만큼 평안하게 지내고 있는 걸까. 다시금 눈을 감아보는 엄마. 그녀는 영화 초반 아무것도 안보인다던 커로우의 풍경과 얼마나 다를까.
“영화의 모든 캐릭터는 어른이 되는 문턱에 서 있다. 아이들은 감정을 보다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우리가 노년이 될 때 다시 찾아온다” 영화 <남색 대문>을 연출한 이치옌 감독은 캄캄했던 시절을 단순히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서투르지만 대문을 열고 한 발짝 내디뎠던 당시의 경험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는 몰랐던 덕에 새겨진 흔적들. 그리고 아이들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이들에겐 넘어서야하는 오늘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에 따르면 관객의 마음을 일깨운 건 아이들의 맑음만이 아니라, 쌓이고 쌓였던 역사가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본다. 단순히 보정된 판타지를 감상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커로우의 고민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비추던 엄마처럼, 여전히 우리의 현실은 다음 대문을 열고 나갈 대답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오답 노트엔 가끔 자기변호가 앞서기도 해서 반쪽짜리 해답만 얻을 때가 있다. 자기객관화 돋보기로 아무리 들여다봐도 일기에 안 적어놓은 게 분명히 있거든. 이에 영화는 간단한 팁을 알려준다. 영화 말미, 장스하오와 마주한 커로우. “여름이 끝나가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정신없던 지난날을 되새기자, 장스하오는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한마디를 보탠다. “뭔가 남은 게 있을 거야. 그 남은 게 우리를 어른으로 성장시킨다”고. 그렇다.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보였지만, 그 여름에는 벅찼던 감정이, 이어진 관계가, 애썼던 시도가 남아있다. 지금 당장은 여름의 햇살이 너무 세서 무엇이 남았나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그 흔적을 언젠간 발견할 거라 독려한다. 세월이 건네준 양산을 들고 돌아볼 수 있는 그때가 되면 반드시.
# 실수마저도 나이기에
미숙한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건 쉽지 않다. 창피하기도 아쉽기도 한 나의 흑역사. 아름다운 어린 시절만 있길 바라는 마음과, 어제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으려는 마음이 부딪힌다. 참 간사하지. 성장은 하고 싶은데 나를 바로 아는 건 왠지 좀 싫은 기분. 그런 딜레마를 눈치챘는지 감독은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도를 한다.
영화 초반, 장스하오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까르르 웃어대던 두 소녀. 이들의 웃음 뒤로 음악이 하나 울려 퍼진다. 호주의 인디 팝 그룹인 ‘Frente!’의 <Accidently Kelly Street>. ‘우연히 만난 캘리 거리를 걸어보자’, ‘대단할 것도 치열할 것도 없이 소소한 거리가 주는 행복을 느껴보자’는 가사가 파릇파릇한 시절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곡은 가사만큼이나 탄생 비화가 더 의미 있다. 베이시스트 멤버의 동네를 떠올리며 썼던 이 곡. 알고 보니 동네 이름이 '캘리'가 아닌 ‘케니’였던 것. 오타를 발견했을 땐 이미 발매가 되어버린 상황. 완벽하지 못한 결과에 아쉬움이 남았을 텐데, 이들의 행보는 달랐다. 틀린 철자는 의도가 아니었고 그냥 말 그대로 실수였다고 웃으며 밝혔던 ‘Frente!’의 멤버들. 오히려 인생의 특별한 시간으로 정의해버린다. 그리고 <Accidently Kelly Street>는 여전히 이들의 최고 히트곡으로 남아있다.
영화 전반적으로 단순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던 것과 달리 유일하게 삽입된 기성곡. 감독은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이 노래를 한번 더 들려준다. 마치 대답 없는 질문만 가득하고,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더라도. 마음 둘 곳 없어 그저 체육관 한쪽 벽을 몰래 채울 뿐이었더라도. 비록 실수만 가득한 시절이었을지라도. 이 모든 이야기가 여전히 어른이 되는 중인 우리에게 에너지가 된다고 응원하는 듯하다. 미래의 나 역시 또 지금을 안주 삼아 그날의 대문을 건너겠지. 오늘의 헛발질도 언젠간 또 하나의 ‘여름이었다’가 될 테니까.
# 어른이 되면서 해맑다는 표현을 듣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다. 차분하고 진중하고 '어른'스러워야 한다고. 그렇다고 딱히 무게감있게 사는것도 아니면서 말야. 그런데 <Accidently Kelly Street>에서 뛰노는 밴드 멤버들의 몸짓을 보니, 오히려 내 세계를 보호하는 건 자유로운 오도방정이 아닐까 싶다. 뭐 어때. 해맑은 게 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