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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 Oct 06. 2024

[얼굴도둑] 가면이 불편할수록 내 얼굴이 느껴져

자신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한 남자가 있다. 허연 피부와 생기 없는 목소리의 부동산 중개업자, 세바스티앙 니콜라.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섞이지 못하고 겉돌지만, 그가 유일하게 몰입하는 순간이 있다. 오가며 만난 사람들의 얼굴로 변장해 그들의 삶을 흉내 내는 것. 표적을 정하고 나면 무서울 정도로 빠져들어, 말투며 행동이며 심지어 습관까지 카피해낸다. 취미라고 하기엔 상식의 선을 넘어 변태스럽기까지 한 기행. 세바스티앙은 그제야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런 그의 앞에 바이올리니스트 몽탈트가 나타난다. 적정 거리에서 몰래 모방하기만 해야 하는데, 이번엔 무슨 일인지 몽탈트의 인생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는 세바스티앙. 그저 타인이 전부였던 텅 빈 자아는 대체 무엇에 반응한 걸까. 그는 전에 없던 용기를 내 고개를 들어보려 한다. 늘 존재했지만 외면했던 진짜 자신의 얼굴을 향해.



# 따라쟁이 인생

있는 그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당신의 고유함을 소중하게. 동기부여 에세이 코너에 발을 들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장들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비슷한 응원을 들었을 터다. 심지어 인생 후배들에게 똑같이 전하기도 했다. 사실 멘트만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인지라 하나 마나 한 조언은 아닌가 싶다. 나답게 살아야 하는 거 누가 몰라.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어’처럼 다 아는 얘기를 대단하게 하는 것만 같다. 근데 희한하게도 이 말을 듣고 나면 가슴 한편이 반응하고 만다. 이 당연한 슬로건을 당연하게 놓치고 있었거든.


집단이 개인에 우선했던 과거의 시대정신과는 달리, 특별한 객체로서 존중받고자 하는 현대사회. 각자의 색채를 인정받으려면 내가 먼저 그 빛깔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의 본모습을 얼마나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나의 고유성을, 취향과 성격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걸까. 혹시 사회적 경향을 내 시선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 수십 년의 역사는 나를 나로서 채워주고 있는 걸까.


영화 <얼굴도둑>의 세바스티앙이 겪고 있는 괴리감도 여기에서 출발했을 터다. 나란 사람을 정의하지 못하는 답답함. 모두 각자의 향기를 풍기는데, 나란 인간은 무색무취의 투명인간처럼 보인다. 껍데기 너머 알맹이가 텅 비어있는 무력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이다. 뚫려있는 자아를 타인의 캐릭터로 메꾸는 것.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겠지만 충격적이긴 하다. 얼굴을 똑같이 분장하고 목소리까지 연습하는 치밀함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표현의 심각함을 조금만 걷어보자. 이거 그저 남 얘기만은 아닌걸.


아빠 구두를 끌고 다니고 엄마 화장품 몰래 바르던 유년 시절. 장난감도 돌멩이도 아닌 나와 닮은 생명체를 따라 하고 싶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며 부모 행동을 교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아이들은 본대로 체험하며 인간을 조금씩 이해하니까. 혼돈의 사춘기 때는 어떠한가. 미완의 자아를 들킬세라 친구들로부터 포착한 행동양식을 내 것인 양 활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흉내를 통해 사고의 활동 범위를 조금씩 늘려간다. 세바스티앙의 따라쟁이 집착은 그리 놀랄 게 아니었다. 우리도 겪었던 자아 생존의 지독한 본능인 셈이다.



# 모방의 진가는 충돌할 때

여러 캐릭터를, 그것도 깊숙하게, 경험해 본 세바스티앙이라면 당연히 자아의 긍정적인 완성을 기대할 만하다. 가면을 쓰고 나간 알콜중독자 모임에선 참석자의 등을 어루만져 준다. 부동산 손님의 목소리를 따라해 상사에게 듣고 싶은 칭찬도 받아낸다. 세상과 말 섞기 두려워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웬걸. 분장을 지우고 앉아있는 그의 얼굴엔 여전히 공허함이 가득하다. 살아있게 만들어 준 변장 도구들은 박스에 담겨 한켠에 쌓여만 간다. 남의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실제 지인을 마주치고는 필사적으로 도망가기도 한다. 비어있는 나를 채워줄 것이라 믿었던 작업실은 그에게 결국 좌절만 안겨준다. 이상하다. ‘보고 따라 하며 배운다’는 자아 성장 필승공식이 어째서 그에겐 적용되지 않는 걸까.


영화 초반 그의 독백에 다시 집중해본다. “미혼의 백인 남성, 명목상 가톨릭 신자, 174cm에 75kg, 갈색 머리와 갈색 눈, 혈액형 A, 한 사람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눈에 보이는 겉모습 외엔 자신을 묘사할 단어를 고르질 못하는 세바스티앙. 그는 외적인 인격 너머 자신의 세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가치관이나 장단점, 성품과 호불호. 내면을 이루는 요소들은 나를 이해하는 평가지표에서 제외된다. 오로지 껍데기로서만 존재하는 인간. 흉내의 대상과 어떤 정신적 교류도 불가능한 인간. 이러니 타인의 영혼에 빙의해 세상과 대화하려는 노력이 무색해질 수밖에. 그렇게 태어난 건지, 학습된 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의 모방이 한계에 부딪혔단 사실이다.



그의 정지된 인격을 보고 있으면, 로이스 로이의 SF소설 <The Giver>의 세계관이 떠오른다. 공포와 슬픔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한단 이유로 모든 기억을 봉인하고 통제하는 세상. 말은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뇌에서 색의 존재도 인식 못 하는 흑백의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자아를 빼앗긴 채 모든 감정을 조종당한다.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느끼는 고통 없는 세상은, 세바스티앙이 살아있다 착각하는 가짜의 삶과 다름없다. 물론 이상향을 향한 모방의 노력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러나 공허함 위에 쌓은 유토피아는 이들처럼 언젠간 무너지고 말 일이다. 어떡한담. 본모습을 묻는 말엔 나도 아직 얼버무리기 일쑤인데. 이에 작가 로이스 로이는 기억을 되찾은 조너스를 통해 우리에게 작은 당부를 전한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영화 <얼굴 도둑>도 세바스티앙에게 비슷한 각성제를 투여한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바이올리니스트 몽탈트를 연기하던 중, 몽탈트의 사생아인 뱅상을 만난 세바스티앙. 평소처럼 영혼 없이 단순 모사에 그치던 그에게 웬일인지 불편함이란 부스러기가 피어난다. 예술에 미쳐 가족을 등진 역할을 도저히 하고 싶지 않다. 다정한 남편과 상냥한 아빠가 되고 싶다. 무의미한 껍데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몽탈트의 필터로 비추니 튀어나온 무언가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이라며 무시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이질감은 그를 행동하게 했다. 그동안 이런 껄끄러움은 없었다. 그저 타인의 가면을 쓰고 아무생각 없이 돌아다니면 그뿐이었다. 내 자아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억이 사라진 <The Giver> 세계관 속 사람들처럼. 내 감정을 느끼는 건 사치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가면에 쓸리는 얼굴을 인지한다. 나도 얼굴이란게 있었구나.


아버지가 부재한 그에게 지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 걸까. 혹은 괴로울 때마다 아버지처럼 토닥여준 신부님에 대한 감사 일까. 수면 아래 있었을 그의 기억은 그렇게 고유함을 발견케 하는 씨앗이 되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는, 그 포인트를 건드려준 몽탈트 덕분에.



# 사실 비어있지 않았어

영화 <얼굴 도둑>를 연출한 마티유 델라포르트 감독은 인터뷰에서 “세바스티앙의 사기적 본성은 역설적으로 진짜를 찾는 일종의 탐구”라고 전한다. 자아의 지도를 밝히기 위함이라면 끊임없이 주변을 따라해 봐도 된다는 독려이기도 하다. 허나 감독은 가면 놀이의 방향을 뒤집어서 제안한다. 나에게 꼭 맞기보단 얼굴 어딘가를 찌르는 가면을 찾으라고. 그제야 내 진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세바스티앙이 멈춘 곳에 함께 서 보니, 영화 내내 그가 보인 행동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따라 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은 주변 사람들의 성향과 태도를 살피고 기억하는 섬세한 사람. 상사의 기념일엔 그에게 어울리는 넥타이를 준비하는 (물론 소심해서 건네지는 못했지만) 다정한 사람. 부동산 중개 손님의 취향을 반영해 선호 매물이 무엇일지 잘 알아채는 센스 있는 사람. 이쯤 되니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에게 따뜻한 아빠 역할을 해주고픈 욕심이 더 이상 오지랖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아는 빈 깡통이 아니었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을 뿐.


겸손이 미덕이라 선비처럼 몸이 굳었는지, 자극적인 세상에 내가 초라해 보이는지, 나만의 빛깔로 가득 차 있단 말이 부담스럽긴 하다. 특별함을 찾기 위해 불편함을 마주하는 것 역시 겁이 난다. 움츠러든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을까. 영화는 중반을 지날 무렵 우리에게 한마디를 건넨다. “아빠가 누구였는진 몰라도, 우리 아빠인 건 알아요” 자신을 애매하게 설명하는 (몽탈트의 모습을 한) 세바스티앙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뱅상.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던 두 사람이기에 당연히 서먹하다. 간극을 좁히려 애를 써도 와닿지 않을 때도 있다. 왠지 너무 외면하고 있던 터라 내 세계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뱅상은 그럼에도 괜찮다고 응원한다. 당신만의 탐구생활을 이어간다면 언젠간 고유한 빛깔을 찾을 거라고. 내가 지금껏 누구였는지 몰랐어도, 내가 나인 건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 아무리 스스로 못나고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도, 세바스티앙의 손재주와 변장술과 성대모사라면 어디서 뭘하든 해낼 것만 같단말이지. 나의 재능엔 야박하고 너의 평범에 박수치는 쫄보인생을 보니 기시감이 느껴진다. 몽탈트를 어쩜 그렇게 똑같이 변장하나 했는데, 1인 2역이었어. 연기한 배우도 대단하고, 분장팀도 연출자도 다 대단해. 이 세상 다 대단해. 다 짱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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