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침, 수척한 얼굴의 한 소년이 말없이 등교 준비를 한다. 소년의 이름은 코너. 매일 밤 똑같은 악몽을 꾸고 있지만, 왠지 두려움보단 지친 얼굴이다. 소년의 현실은 그보다 가혹하기 때문에. 5살이 될 무렵, 미국으로 떠나 다른 가정을 꾸린 아빠. 불치병에 걸린 터라 집안을 전혀 챙기지 못하는 엄마. 규칙을 강조하며 숨 막히게 하는 외할머니. 게다가 학교에선 괴롭힘까지 당하는 중이다.
하루하루 빛을 잃어가던 어느 밤, 코너 앞에 커다란 나무 괴물이 나타난다. 지금부터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마지막엔 너의 악몽을 들려달라는 나무. 그런 건 됐다며 엄마를 살려달라 외치지만, 이내 알쏭달쏭한 동화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곤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마주한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만으론 현실의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는 법. 코너는 그제야 끈질기게 겁을 주는 나무의 의도가 느껴진다. 악몽을 넘어설 열쇠는 자신이 외면했던 마지막 이야기에 있다는 것을.
# 알 수 없음의 공포
살다 보면 재미 삼아 해보는 일들이 생긴다. 신년이 되면 한 해 운세를 보고, 사랑의 분수엔 동전을 던져본다. 말 그대로 기분 전환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신점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잊지 않으려 초집중하고, 동전을 올려놓은 손가락을 향해 온 세포가 몰두한다. 벌어지지 않은 미래를 두고 베팅하다 보니 괜히 무게가 실리는 걸까. ‘그냥’이라 말했지만, 뒤에 ‘혹시’를 숨기고 있었던 걸까. 분명 가볍게 즐기는 단순 이벤트였는데 말이야.
알 수 없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명료할 수 있다면, 과학적 추론은 살짝 접어놓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인가 싶다. 가벼운 예상일지라도 수습이 사정권을 벗어나면 두려움이 몰려오니까. 하지만 동전에, 혹은 부적에 깃든 영험한 기운만으론 캄캄한 내일을 증명하기 어렵다. 내일은커녕 십 분 뒤도 판단이 안 선다. 가능한 건 오직, 벌어진 현재를 해석하는 일. 매 순간, 환경을 파악하고 인과관계를 이해하면서 나름의 결론을 맺는다. 그리고 나서야 걸어온 발자국에 내 관점을 비추어 조금이나마 예측을 해볼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경험치가 있어야만 가능한 법. 즐겁고 행복한 파도는 오는 대로 맞으면 되는데, 괴로운 폭풍우는 튜브 없이 뛰어들 용기가 나질 않는다. 하물며 영화 <몬스터 콜>의 코너는, 이제 겨우 11살 남짓 된 어린 소년은 무슨 힘으로 아침을 준비할 수 있겠어.
“치료 후엔 늘 아파요! 내일은 괜찮아질 거예요!” 코너는 무서운 할머니보단 엄마 옆에 있고 싶은 마음에 소리를 질러보지만, 이내 쓰러지는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무겁다. 최대한 빨리 오겠다며 미국으로 돌아가는 아빠에게 화를 내가다가도 다시 안기는 코너. 하지만 부자의 연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다음 스텝을 떠올리는 건 고사하고, 현재를 해석할 단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러니 “사물을 규정하는 것을 수학적으로 풀면 기본 상수 e가 나온다”는 선생님의 수업이 귀에 들어올 리 있나. 풀이 과정이 무슨 의미야. 나의 하루도 제대로 규정이 안 되는데.
# 수채화의 무서운 묘미
그런 날이 찾아올 때가 있다. 어느 순간, 어느 장면에서 멈춘 인생이 도저히 내 언어로 번역이 되지 않던 그런 날. 그럴 땐 전문가의 도움을 슬쩍 받아보기도 한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 중에 몇 장을 뽑아 삶에 대입해 본다. 생년월일에 태어난 시까지 살피기도 한다. 해석을 들어보면 그럴듯하다. 하지만 앞뒤 자른 외주 번역은 가끔 어딘가 문체가 와닿지 않아서, 때때로 인생 책을 다시 펼쳐야 한다. 어쩔 땐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며, 무작정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도 한다. 분노가 차올라 몇 장씩 찢기도 한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팽개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얄팍한 수는 어림없다. 마치 매일 밤 같은 장면으로 회귀하는 코너의 악몽처럼, 정신 차려보면 미해결 페이지로 돌아와 있다. 문단을 건너뛰면 이야기는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다. 놓아주지 않는 악몽의 끝을 뭐가 됐든 내 눈으로 읽어내야 한다. 납득이 될 때까지.
한데 스스로 극복이 가능했으면 이렇게 정체되어 있지도 않았을 터다. 발목을 잡는 혼란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거기서부터 이미 막막한걸. 이에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은 영화 <몬스터 콜>의 연출법을 통해 엉킨 삶을 풀어낼 작은 실마리를 제시한다. “수채화 기법 덕분에, 동화는 대부분 형상만 보이게 되고 관객은 그 모양을 해석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고 있는 것을 통해 나만의 해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원작 <몬스터 콜스>는 삽화가 가득 담긴 그림책이다. 영화화하게 되면 그림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바요나 감독. 그는 고민 끝에, 나무 괴물이 들려주는 동화 부분을 수채화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겠다 결정했다. 캐릭터의 명확한 얼굴을 보여주면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하게 된다. 따라서 관객 스스로 이야기를 해석하는 공간을 만들어주기로 한다. 물기의 흘러내림과 명확하지 않은 테두리, 그리고 우연히 겹치는 색채까지. 수채화의 모호함은 영화의 의도를 탁월하게 전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하나의 동화를 들려주지만, 동시에 수만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단 걸 경험케 하려는 연출적 시도. 떠올린 인상이 관객끼리 상충 되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 뒤틀림을 환영한다. 그 순간 각자의 인생을 자유로이 비춘 결괏값이므로.
이는 나무 괴물이 코너에게 전하던 세 이야기와도 닿아있다. 선과 악이 명확했던 마녀 왕비와 용맹한 왕자도, 약제사와 목회자도 알고 보면 그 경계가 모호하다. 입장에 따라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지막지한 악인이 된다. 영락없는 모순이다. “그럼, 대체 누가 착한 사람이냐” 묻는 코너에게, “세상엔 항상 착한 사람도, 항상 악한 사람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전하는 나무. 정의와 욕망, 진실과 거짓이 한 덩어리 안에 혼재하다니. 인간의 모습은, 마치 붓 터치마다 농도가 제각각이어도 결국은 하나의 그림이고 마는 수채화인 걸까. 편리한 변명에 숨어 지적질을 피하려는 속셈이냐 물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영화는 악몽을 마주한 코너의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 역으로 묻는다. 내 안에 거두기 어려운 치명적인 모순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상반된 두 얼굴을 모두 편리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 하루에도 수백 번 모순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시야가 달라지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인식이 변하는 건 당연한 말. 하지만 창으로 뚫고 방패로 막겠다고 동시에 외치면, 난 어느 편에 손을 들어줘야 할까. 그것이 인류애를 건드리는 가치관의 충돌이라면. 나는 절대 아닐 거라 믿었던 날것의 본능이라면. 이색 저색 섞인 탓에, (내가 규정한) 상식을 잃어버린 모순덩어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문득 외할머니의 거실을 부수고, 동급생에게 주먹세례를 퍼붓던 코너의 모습이 스친다. 혹독한 체벌을 예상했지만, 혼내지 않겠다는 아빠와 선생님의 말에 당황하는 코너. 그러고 보면 소년의 폭력은 단순히 억압됐던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자기혐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하더라도, 이 모습만큼은 내가 아니길 바랬기에. 어쩌면 공식적으로 벌을 받아 죄책감을 씻어보려는 일종의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 자기모순을 인정하는 것은 죽을 만큼 겁이 나기 때문에.
“이 책은 근본적으로 상실의 두려움에 대한 내용입니다” 원작 동화 <몬스터 콜스>를 쓴 패트릭 네스 작가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초월적 감정을 다뤘다고 밝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이 주된 흐름이지만, 나아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외면했을 때 겪게 되는 고통을 담고 있다. 수채화처럼 동시에 여러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심지어 그 빛깔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에 밀어내고 모른 척한다면, (내가 규정한) 내 모습을 상실할까 두려워한다면, 악몽은 매일 밤 내 방 창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해석의 폭을 넓히라 강요할 순 없다. 표정을 잃고 관성적으로 등교를 준비하는 코너에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막막한 시절의 우리에겐, 그저 인생을 마주하란 조언은 무책임하니까. 이에 영화 <몬스터 콜>은 심연을 헤매는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우화와 비유를 통해 천천히 단계적으로 코너의 마음을 열고자 했던 나무. “인간은 복잡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중요하지 않아, 뭘 하느냐가 중요하지”라며, 그저 떠오른 생각만으로 자신을 찌르지 않길 당부한다. “나중에 혹시 오늘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 안 했던 게 생각나더라도 마음 아파할 필요 없어. 엄만 다 알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엄마는, 과거에 자신도 겪었을 같은 마음을 공유하며 아이를 어루만진다. 그렇게 코너는 한 걸음씩 뗄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던 자신 인생의 해석본을 향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이 코너이고, 모든 사람이 나무 괴물이고, 모든 사람이 어머니”가 되길 바란다던 바요나 감독. 지난 세월 코너였던 날 일으켜 세워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번엔 내가 괴물과 엄마가 되어볼까. 싶다가도, 나를 돌아보면 왜 난 여전히 코너인 건가. 변함없는 모순에 감탄할 새가 없다. 이번에도 저를 살려줄 나무 괴물과 어머니 역할을 찾습니다. 덜 힘들게 할게요.
# 속앓이를 어디에도 하지 못하고 화살을 자신에게 쏘던 코너. 그런 코너가 자신의 이야기를 결국 마주하게 하는 나무의 노력은, 그 옛날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상담이 문제해결의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막고있는 감정의 바위를 발견하는 지도 정돈 된다. 막연한 응원도 아닌것이, 괴로운 훈계도 아닌것이,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어떻게든 손에 랜턴을 쥐어주고 걷게한다. 다리에 힘이 생길 때 즈음, 그제야 한마디 하신다. '아버지와 얘기를 한번 해보자'고.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 끝에 코너도 성장한다. 그리고 코너를 어루만지듯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따뜻한 보이스의 록음악이 나온다. 밴드 '킨'이 부른 <Tear Up This Town>, 이 노래는 도시를 무너뜨리라고 강력하게 주문한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장애물을 부숴보도록 용기를 준다. 저 구석탱이 바닥을 망치로 툭 건드는 수준일지라도.
한번에 함락시키는 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오래된 도시일 수록 걷어낼 먼지들이 너무 많다. 이젠 제발 평소에 정리할 건 묵히지 말길, 지난 날의 전쟁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