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최북단의 작은 마을 존오그로츠. 톰은 얼마 전 아내 메리와 사별하고 적막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텅 빈 텃밭을 바라보다 문득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는 톰. 목적지는 바로 잉글랜드 남서쪽 맨 끝에 자리한 랜즈엔드(Land’s end), 오래전 아내와 함께 떠나온 그의 고향이다. 1,000km가 넘는 거리가 부담돼서, 혹은 도망치듯 벗어났던 기억이 발목을 잡아서, 고향을 향한 마음을 내려놓아야 했었는데. 이젠 돌아갈 준비가 된 걸까. 톰은 작은 가방과 노인 무료 교통카드를 들고 홀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아흔 살의 여행은 그 시절 신혼부부와 같을 리 없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고, 소매치기를 당하고, 유일한 길잡이인 지도마저 비바람에 날아 가버리는, 험난 그 자체. 그럼에도 고집스러운 발걸음은 멈출 줄 모른다. 인생에 다시없을 마지막 버스 길. 그 멀고 먼 땅끝에서 돌아본 발자취엔 과연 무엇이 남아있길래.
# 아픔을 잊게하는 목표
우리는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초(超)시대'에 살고 있다. 각자의 가능성을 초월해 융합되고 연결되는 시대. 시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해, 언제 어디서든 개인의 능력치를 발휘하는 시대. 디지털이 삭제해 준 사회적 거리 덕에, 인류는 이토록 친밀한 이웃이 되었다. 초시대가 도래했다고 모두가 자연스레 입주민이 되는 건 아니다. 미래형 인간에 걸맞게 시시각각 변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단순히 생활 앱 업데이트만으론 초인간이라 볼 수 없다. 배달 하나 시키려 해도 혜택 규정이 매번 달라져 있거든. 기습 할인은 늘 내가 모르는 커뮤니티에 공지되거든. 단 1초 버벅댔을 뿐인데, 이미 세상은 나를 한참이나 지나쳐 간다.
좌절이다. 터치스크린과 함께 자란 아이들도 디지털 활용능력엔 차이가 생긴다. 하물며 아날로그에 젖어있던 느림보들은 어떡하라고. 정보는 쏟아지고, 해석은 개인의 몫이며, 새로운 의제가 꼬리를 물고 출몰하는 세상. 큰 그림은 고사하고 붓 준비만 했는데 미술 시간이 끝난다. 여전히 흰 도화지인 스케치북이 왠지 미안하다. 이러다 누렇게 종이가 바래는 걸 우두커니 쳐다만 봐야 하는 걸까. 분초를 다투는 '초(秒)시대' 인간으로서 애초에 실격인 걸까.
변혁의 시기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 다급할 필요 없다며 다독여주는 조언이 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명확한 목표가 있다면 조금 늦더라도 불안할 필요 없다는 한마디. 당신의 방향에 우직하게 걸어가라는 응원이다. 그렇다.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초시대의 압박은, 미래의 확실한 믿음 앞에선 장애가 되지 않는다. 마치 영화 <라스트 버스> 속 느린 걸음으로 떠난 톰의 여행처럼.
육지의 최장 거리 끝과 끝을 완주하겠다는 그의 계획. 아찔하다. 거리만으로도 경악인데 기차나 비행기가 아닌 굳이 시내버스라니. 장시간 도로 위에 있는 건 젊은 사람에게도 고역이다. 평탄한 고속도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국도도 거쳐야 한다. 배차가 안 맞으면 한참이나 정류장에 대기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톰은 전혀 타격이 없다. 부상을 당하고 기력이 떨어지는 게 분명 보이는데 포기가 없다. 언젠간 닿을 거란 다짐이 떨어지는 고개를 붙잡는다. 버스길 곳곳에 숨어있는 아내와의 추억을 오롯이 느끼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 톰의 마음속 나침반은 그렇게 마법을 부린다.
# 도착하기까지 안전할 수 있던 건
단단한 방향성이 주는 긍정적 효과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테다. 단지 실천이 어려울 뿐. 보이지도 않는 저 멀리 한 점만 보고 어떻게 걸어가냔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버스 환승 정보를 빼곡히 적던, 노인 무료 교통카드를 꼭 쥐고 있던 주름진 손이 오히려 우직해 보인다. 신체적 한계는 계산에 없다.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없다. 그저 목표를 향한 집념뿐이다. 대체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영화 중반, 여행에 지친 톰은 버스에서 잠이 든다. 꿈에 나타나 그를 보듬어주는 아내 메리. 톰은 그녀의 미소에 화답하듯 나지막이 속마음을 전한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고. 여행 내내 주변의 우려에도 아무 말 없이 땅끝만 바라보던 톰. 가슴 깊이 간직한 이유를 듣고 나니, 내내 안쓰러워하던 제삼자의 시선이 벗겨진다. 행여나 잃어버릴세라 서류 가방을 부여안은 가슴팍. 이는 슬픔이 이끄는 단순한 몸짓을 넘어선다. 나이를 뛰어넘는 필사적인 생기. 톰을 이끌던 힘은 바로 간절함이었다.
절실하게 원하면 어쨌든 동력이 된다. 할 수 있다고 되뇌이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유명 자산가들의 에세이에 그렇게 적혀있다.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을 붙여보자. 그 목표가 인생의 유일한 이유라면 어떨까. 속도보단 방향이랬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떨까. 확실한 목적지가 있다는 건, 부담 없이 숨을 고르라는 응원이었을 텐데. 조급함 앞에선 재정비할 호흡은 어느새 증발하고 만다.
톰 역시 마찬가지다. 상처가 곪아 욱신욱신해도,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이 없어도, 경주마처럼 쉬지 않고 직진이다. 다른 옵션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없다. 간절함은 때론 모든 신경을 차단하는 모르핀일지도 모른다. 온몸에 생채기가 나도 개의치 않는, 멈출 때를 몰라서 무섭기도 한.
톰의 여행이 후반으로 넘어갈 무렵, 결국 제동이 걸린다. 믿었던 노인 무료 교통카드의 효력 상실. 특정 지역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순수한 동기만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현실을 이제야 자각한다. 무턱댄 간절함은 규칙을 잊게 하는구나. 물론 목표가 소중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것밖에 안 보이는 걸 어떡해. 멈춰서 눈을 뜨니 그제야 보인다. 차선이 있고 신호등이 달린,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인생길에 서있다. 저항도 소용없다.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그런데 버스 기사의 마지막 말이 희한하다. 이미 그가 500km 넘게 무임승차 중이었다니. 그동안 버스기사들은 몰랐던 건가? 그게 가능해?
“이 의식의 목적은 슬픔과 상실을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행 자체가 아닌 의식만 생각합니다. 그가 잊은 건 이것이 하나의 여정이라는 점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예상치 못하게 다시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 <라스트 버스>를 연출한 길리스 매키넌 감독은 한 곳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그 탓에 놓치는 삶의 지점을 짚는다.
톰에게 버스는 단순히 목적지까지 자신을 데려다주는 운송수단에 불과했다. 그것도 수십 번의 환승을 겪다 보니, 짧게 스치는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테다. 하지만 딴생각하는 와중에도 인생의 관성은 묻어나는 법. 도랑에 빠진 차를 보곤 어느새 나서서 끌어주고, 인종 차별하는 젊은 승객에겐 화를 내며 덤빈다. 그에겐 당연한 인간애였기에 대단할 것도 아니었다. 목표를 향하는 와중에 겪은 아주 사소한 순간일 뿐이었다. 버스를 옮겨타면 이미 그의 선행은 머릿속에선 휘발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땅끝에 가는 거니까.
하지만 웬걸. 톰의 주목하지 않았던 자신의 발자국들은 따스함을 간직한 채 길 위에 살아남았다. 그 흔적들은 고유한 붓터치로 이어지며 그가 모르는 사이 그림이 되었다. 결승선만 바라보며 넋 놓고 비워놨던 하얀 스케치북엔, 톰의 여정이 빼곡히 채워진다. 지도 위에 그어놓은 여행루트는 단순한 한 줄의 선이었지만, 펼쳐놓고 보니 그의 향기가 담긴 작품이 되었다. 현장의 감동은 관객을 움직이는 법. 입소문은 톰의 속도보다 빠르게 땅끝을 향했고, 인간애를 가득 담아 돌아온다. 그리고 톰이 방향을 잃으려는 때마다 부축한다. 노인 무료 교통카드를 더 이상 쓸 수 없는지도 몰랐던 500km 전부터 꾸준히.
# 잇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할아버지의 버스 여행기를 다룬 영화 <라스트 버스>. 왠지 실화 기반이지 않을까 싶지만, 각본가 조 아인워스의 오리지널 창작극이다. 아버지와 장인이 노인 무료 교통카드를 이용해 함께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조. 그가 주목한 ‘버스 패스’의 매력은, 작은 여정이 끊임없이 이어진 한 줄기 버스 길이었다. 멀리서 보면 한 붓으로 그려낸 지도위의 선이지만, 노선마다 나름의 매력을 갖춘 도로들. 조는 1,000km가 넘는 영국의 종단길로 톰의 굽이굽이 아흔 인생을 고스란히 묘사해 낸다.
그의 고향 랜즈엔드까지 직선거리로 한 번에 갈 수 있다면, 여정이라 부를 것도 없겠지. 수면안대 쓰고 잠시 기절하면 도착해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노선은 없다. 반드시 어느 구간은 경유하고, 환승하고, 쉬어야 한다. 그 덕에 그 옛날 톰과 메리는 어느 마을에서 오붓하게 점심 한 끼를 했을 터다. 어떤 동네에선 5성급 호텔은 아니어도 둘만의 아름다운 밤을 보낼 수 있었을 터다.
모험의 마법은 오늘날에도 이어졌다. 실수로 종점까지 가버리고, 더 이상 버스를 탈 수 없게 되더라도 괜찮다, 그럴 때마다 낯선 거리에서 만난 인연은 물 한 모금을 나눠주고, 다음 버스는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 나를 태우고 이동한다.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는데, 삐져나온 오솔길이 실핏줄처럼 이어져 다시 국도로 올려놓는다. 초인간이 되지 못한 아날로그 인간이라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여정 자체가 이미 초시대의 롤모델이었는 걸. 쫓아가느라 숨 가쁜 인생 여정은 그렇게 끊임없이 지도를 완성한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혁명이 아닌, 정류장마다 존재하는 인류애와 함께.
“다들 열심히 살았지만 뭘 했는지 모를 하루, 잘 보내셨습니까?” 만화 <미생>의 신입사원 장그래는 방향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는 업무에 비틀댄다. 방향이 중요하다면서 속도도 요구하고, 내가 탄 버스가 반대로 가고 있는지 감이 없다. 분명 처음엔 목적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말야. 영화 <라스트 버스>는 장그래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잠시 앉을 정류장이 있다고 전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내일로 갈 수 있는 시내버스가 온다고 다독인다. 물론 고속도로에 오르기 위해 몇 번 갈아타는 수고를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도 언젠간 한 번쯤 떠올릴 풍경이라며 웃어보인다. 이조차 내 지도를 이어갈 작은 버스노선이 될 거라고.
버스를 너무 많이 타서 멀미가 날 것 같으면, 아주 먼 데로 떠난다는 톰에게 동네 꼬마가 전하던 작별 멘트를 떠올려보자.
“재밌겠어요!”
그래 재밌을 거다. 아무튼 나의 여행이니까.
# 유튜브 따윈 안중에도 없던 미니홈피 시절. 시내버스만 이용해서 서울부터 땅끝까지 가는 괴상한 ucc를 본 기억이 있다. 영상에 등장한 청년은 흰 티셔츠를 입고 버스 맨 앞에 서서 이 미친짓을 설명한다. 그리고선 앞자리 앉은 승객에게 티셔츠에 도착지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화면이 바뀔때마다 티셔츠의 화살표는 늘어나고, 글씨들이 온몸을 휘감고 나서야 도전은 끝이난다.
지금이야 세상이 도전 과포화상태라 이정도 기획은 놀랍지도 않지만, 처음 영상을 접했던 당시엔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야. 치기어린 젊음의 한때의 추억일거라 평가절하했다.
그런데 희한하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여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하얀 티셔츠 위로 조금씩 수놓아가는 수많은 화살표들. 그 길에 만난 사람들의 온갖 글씨체들. 단순한 부탁에도 괜히 또박또박 써주는 손에 응원이 담겨있지 싶어 뭉클하다. 인생은 여행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그래도 끊임없이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싶다.
이 영상 다시 보고싶은데 찾을 수가 없네, 아쉽다.
반대편 정류장이랄게 없는 인생이라, 나중에 돌고돌아 우연히 마주치면 격하게 반가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