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와이오밍주의 작은 마을 랜더. 그리고 그 안의 원주민 보호구역, 윈드리버. 로키산맥의 설경이 모두를 포근하게 안아주지만, 때때로 몰아치는 눈보라는 피의 역사만큼이나 날카롭다. 슬픔이 잔뜩 서린 이 땅에 어렵사리 보금자리를 개척한 야생동물 헌터 코리. 가정을 이루고 친구도 있지만, 그의 눈은 왠지 슬픔으로 가득하다. 거센 눈발이 내려앉은 어느 날. 윈드리버의 깊은 숲속에서 차갑게 얼어버린 한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상황을 파악하고 인도하기 위해 급히 파견된 FBI 요원 제인. 그러나 제도의 바깥으로 내몰린 원주민 사회이기 때문일까. 처참한 광경에도 사건화시키기 쉽지 않다. 제인은 문명의 충돌에 혼란스럽고, 코리는 나름의 슬픔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광활한 벌판에 새겨진 흔적들을 조심스레 파헤치기 시작한다. 다시는 하얀 눈 위에 똑같은 비극이 감춰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 결국은 사각지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을 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이들은 찬사와 주목에서 한발 물러난 채,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며 세상에 크고 작은 의미를 더한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과 상관없는 삶이라 해도, 수고했단 박수가 빠지면 내심 서운한 게 사람 마음. 노래로 불리지 않은(Unsung) 인생을 듣고 나면, 왠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는다. 아마도 스포트라이트 너머 끊임없이 뒷받침한 조력자의 땀방울이, 조연 같은 내 인생과 겹쳐 보이기 때문일 거야.
그런 공감대 덕분일까. 숨은 영웅을 조명하는 작품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득점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사각을 보호하는 ‘퍼스트 태클’에 집중한다. 다큐멘터리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도 비슷한 맥락이다. 메인 멜로디를 풍성하게 살려주는 화음이야말로 감동의 중요한 요소라 전한다. 그렇다. 모두가 쿼터백이고 메인 가수인 세상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각지대에서 세상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적절히 관계를 이룬 순간, 비로소 톱니바퀴는 서로를 보드랍게 감싸며 제 속도를 찾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균형의 한 축이라 지칭해도 사각지대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등잔 밑은 당연히 어둡고, 시선은 360도를 커버하기에 한계가 있다. 조명받지 않으면 우선순위 싸움에서 불리한 건 사실이다. 드라마 <우리 변호사는 손이 많이 간다>의 베테랑 매니저 쿠라마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잖아”라고 외치지만,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듯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언성 히어로’ 배지는 미디어에서 토닥여주는 시혜적인 타이틀이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너의 인생에 주도권이 있다는 듯 팔목을 들어 올려준 것에 비해, 내 삶은 여전히 눈보라를 걱정해야 하니까.
# 소외를 푸는 열쇠
영화 <윈드 리버>에 등장하는 원주민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와이오밍주 공식 여행 웹사이트에는 영화에 배경이 된 랜더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림 같은 풍경의 고요한 서부에서 만나는 풍부한 미국 원주민 문화’.
원주민들의 삶과 지혜에 박수를 보내는 문장 일색이다. 하지만 힐링 가득한 웹사이트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사각의 이야기가 있다. 살인이 의심되는 시신이 발견됐어도 연방법원의 조치 아래 움직여야 하는 비효율적 사법 체계. 자체 인력은 단 6명의 보안관뿐이라 범죄 통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아메리칸 원주민 여성들의 실종신고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실종됐는지 모른다’는 엔딩 자막은 사각의 혹독함을 더욱 진하게 불러온다.
바깥으로 밀려난 경험은 그 역사가 깊어질수록 반전의 기회를 잃기 마련이다. 윈드리버의 칼날 같은 바람도, 17세기 유럽인들에 의해 강제로 이주해야 했던 슬픈 시절에 기인한다. 문명화를 내세우며 이름 붙인 ‘원주민 보호구역’. 이곳엔 억압과 통제가 주목적이었던 역설이 묻어있다.
보호 따윈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피부와 문화를 이어가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변방으로 내몰리며 오히려 이방인 취급이라니. 그렇게 세대를 거치며 좌절은 유전되고, 공동체는 점점 고립된다. 아픔은 주류가 정한 타이틀에 희석되며 적당히 웹사이트에 흘려 쓴 글귀로 수렴된다. 세상은 원주민을 그렇게 두리뭉실 마음대로 기억하기로 한다. 그러니 라스베이거스에서 점퍼 하나 대충 주워 입고 수사하러 오는 게 아니겠어. 윈드리버가 얼마나 추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려졌던 문명 간의 충돌이 단순히 옷을 껴입는 것으로 해결되면 얼마나 편하리. 인간은 그저 계절 감각으로 구분할 일이 아닌걸. 피해자 나탈리의 가정을 방문한 제인은 사망 소식을 접한 엄마의 자해에 말을 잃는다. 총상에 죽어가는 마약범을 그대로 죽게 내버려두는 보안관엔 혼란스럽다. 지금껏 알고 있던 생활 규칙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그녀. “조금 전까지 화창했다가도 다시 지옥같이 몰아친다”는 이곳 날씨만으로도 적응하기 힘든데 말야.
대화의 부재가 어찌 한쪽의 눈만 가렸겠는가. 증거불충분에도 수사를 이어 가보지만, 경계를 놓지 않는 원주민 사회에 연신 부딪힌다. 나탈리의 오빠는 수사를 돕는 코리에게 “당신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선을 긋는다. 오랫동안 방치된 사각은 신뢰와 공감의 문을 철저히 닫아버렸다. 누구의 탓도 아니면서 모두의 탓인 듯한 공교로운 어긋남. 녹슬어버린 소통을 우린 극복할 수 있을까.
“제가 이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이 저를 많이 믿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 일이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진행된다는 걸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제가 직접 연출하는 것이었어요.”
테일러 쉐리던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영화 <윈드 리버>를 대했던 태도를 밝혔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와 <로스트 인 더스트>, 그리고 <윈드 리버>까지. 평단이 쉐리던 삼부작이라고도 칭할 정도로, 그는 각본가로서 끊임없이 인간의 고립과 경계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웬일인지 전작과 달리 연출을 맡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원주민 지역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는 자부심 때문은 아닐 테다. 주류사회와 사각지대를 잇겠다는 사명감과도 사뭇 다른 빛깔이다. 그가 언급한 ‘신뢰’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영화 초반, 제인이 피해자 가족을 만나 사건을 청취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며 다짜고짜 의견을 내놓는 제인. 이에 피해자의 아빠 마틴은 “FBI는 이런 걸 도움이라고 하느냐”며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대답한다. 가해자 없는 이곳에서 괜한 긴장감을 불러오는 대치 상태. 그러나 코리가 뒤늦게 찾아오고 괜찮냐는 한마디를 건네자, 마틴은 그동안 참아왔던 통곡을 쏟아낸다. “이곳을 이해하려 노력 중”이라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찾으려던 진실보다 우선한, 슈퍼진실을 놓쳤다는 듯이.
이는 아마도 영화를 준비하며 자신도 모르게 가졌던 시혜적인 태도를 스스로 꼬집는 장면일 터다. 제인의 수사를(혹은 셰리던의 영화를) 막고 있던 벽은, 서로를 모른 채 굳어버린 거부감 탓이 아니었다. 주류에 속해서 쉽게 넘겨버렸을 문제. 언제든지 같은 공포와 슬픔을 겪을 수 있는, 누구도 사각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인간임을 잊었기 때문이다.
영화 말미, 눈밭에 쓰러져 피해자가 겪었을 공포를 경험한 제인. 깨어난 뒤 서럽게 흘리는 그녀의 눈물엔 왠지 감독의 반성이 비친다. 외면당한 아픔을 꺼내놓기까지 그저 당사자의 용기에만 기댈 게 아니었다. 동등한 경험자로서의 신뢰 회복. 그곳에 소외가 난무하는 세상을 풀어낼 열쇠가 있었다.
# 여긴 여전히 우리의 땅인걸
그러나 우리 주변의 사각지대가 한 둘인가.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영역 중에 나와 관계된 이야기가 아니면 귀 기울이기 쉽지 않다.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빛을 어떻게든 수집해서 모조리 뇌로 보낸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요상하게도 시각정보가 빠져나갈 통로 부분에는 광수용체가 없단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뜬다 한들, 맹점에 닿은 빛은 우리의 뇌를 비껴간다.
"내가 그 아일 지켜주지 못했어요. 언젠가 자식을 갖게 되면 한순간도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 줘요."
수사 중반, 코리는 제인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수만번 확인해도 아픔은 기어코 작은 틈을 찾아 스며든다. 그의 회한이 더욱 속상하게 느껴지는 건, ‘퍼스트 태클’을 자처해도 결국은 허점이 생기고 마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리라.
어느 한구석을 이처럼 놓치고 있다면 일상에 분명 티가 나지 않을까 싶다. 한데 우리는 희한하게도 맹점을 인식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그 이유는 바로 두 눈의 맹점 위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 한쪽 눈의 맹점을 다른 눈이 보완하면서, 비어있는 시야를 채워준다고 한다. 애를 쓴다 해도 혼자서 모두를 아우른다는 건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몸은 생물학적 설계를 통해 마법처럼 장벽을 극복한다. 수사의 시작을 위해 도시의 개입이 필요했던 야생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야생의 혜안을 빌려야 했던 도시처럼. 그렇게 인간은 공교롭게 어긋난 덕에 광활한 설원에 가려진 슬픔을 결국 찾아내고 만다.
그러나 진실을 찾는 것도 같은 방향을 바라봤을 때나 의미 있을까. 배경과 욕심이 서로 다른 이 세계에서, 사각을 보완하는 법을 익히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원주민 보호구역을 찾은 노동자들은 척박한 환경에 인간성을 잃는다. 대학까지 나온 나탈리의 오빠는 주류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피폐해진다.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를 늘어놓고 발맞춰 나가라는 조언은 서로를 상처 내는 강요일지 모른다. 영화 <윈드 리버> 역시 무리했던 제인의 수사를 통해 섣부른 공감과 연대를 경계했다. 그러나 영화는 아이들이 함께 놀았을 그네 앞에 나란히 앉은 코리와 마크를 통해, 그럼에도 서로의 톱니를 조심스럽게 다듬어가길 권한다.
원주민의 오랜 전통인 죽음의 표식을 얼굴에 그린 마크. 떠난 딸아이를 잠시 추모하고자 하니 같이 있어 달란 그의 부탁에, 코리는 슬며시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여기가 우리 땅인데 어딜 가겠어요” 한없이 넓고 넓다 보니, 내 사각이 너의 본진이기도, 나의 진실이 너의 불편이기도 한 세상. 그렇지만 여전한 생명력으로 다음 세대가 살아갈 곳임을 짚어준다. 사각의 ‘퍼스트 터치’가, 스무 발자국 뒤에서 불러주는 화음이, 외면된 슬픔에 직접 나서서 신뢰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딸이 꿈꿨던 아름다운 초원을 마음에 품고 기꺼이 서로의 맹점을 보완해주는 마음. 내가 겪은 슬픔이 최대한 반복되지 않도록. 여전히 이곳은 우리의 땅이니까.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한가로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동안 세상을 지탱해주신 수많은 ‘언성 히어로’님들 덕분이려나. 감사한 마음만큼 다음 세대를 위해 역할을 담당할 준비가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음 아직 한참이나 모자라다. 제 차례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더 크고 할게요.
# 따뜻함에 가끔 쓸쓸함이 묻어있다. 나에게 필요했던 다독임을 너에겐 불어주겠다는 손길이 담겨서 그럴까. 부담스럽지 않도록 내 약점도 한스푼 담았기 때문일까. 강인하고 우직한 제레미 레너의 눈에 아련함이 비치는건, 단순히 그의 타고난 피지컬 때문만은 아닐거야.
오늘의 슬픔은, 우리 등을 스쳐간 깃털과도 같다 얘기하는 Willam Wild의 <Feather>. 스크린 너머 관객 모두의 사각을 위로하고자 하는 엔딩곡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