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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썬] 이제 겨우 이해할 나이가 되었는데

by 오달

1990년대 어느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11살 소피와 그녀의 아빠 캘럼은 방학을 맞아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다. 서먹한 듯 보이다가도 까르르 웃고 떠들며 휴양지를 잔잔하게 즐기는 두 사람. 호텔의 수영장, 스쿠버 다이빙, 저녁 파티, 그리고 야외 머드 온천. 대단할 건 없어도 소소한 이벤트를 함께 보내며 떨어져 지냈던 간격을 좁혀간다.


틈나는 대로 기체조를 하며 심신 안정을 찾는 아빠가 요상하지만. 응석받이 꼬마와 사춘기 소녀를 오가는 딸의 기분을 맞추려 애를 써야 했지만. 그 모습을 순간순간 담담하게 담아내는 홈비디오 캠코더와 함께, 다른 듯 닮은 소피와 캘럼은 평생에 다시없을 한여름의 일주일을 보낸다.



# 너를 알고 싶은 이유는 결국

언젠가 노래를 감상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0대엔 가수를 쫓고, 20대엔 멜로디를 들으며, 30대를 넘어선 가사를 곱씹는다"


물론 날 울리는 가사 역시 시절마다 존재한다. 이 세상 모든 노래가 내 이야기인 것 같던 빛바랜 기억은 누구나 있으니까. 그럼에도 감상의 깊이를 논할 때, 세월감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삶이 축적된 만큼 화자를 이해할 교집합이 깊어졌기 때문일 테다.


이런저런 삶의 조각을 반영한 노랫말을 마주하다 보면, 창작자가 바라봤을 세상이 그려진다. 마주한 적도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지만, 묘하게 그들의 감각을 이해하게 된다. 같은 고민에 빠졌던 동질감일 수도, 동시대를 사는 동료로서 공감대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관객들은 자신의 건드린 문장을 돌아보며,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을 맞춰나간다.


감동의 시작점을 기분탓 이상으로 설명하지 못할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적신 포인트는 분명 있을거란 말이지. 멜로디에 늘어놓은 단어들이 단숨에 와닿지 않았더라도, 호흡과 감정을 느끼며 곱씹다보면 조금씩 힌트가 찾아온다. 꺼내어 비교해 볼 인생 단어들이 꽤 늘어났거든. 그렇게 감성의 결을 맞춰보다보면 철컥 하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 온다. 어린 시절 그저 흥얼거렸던 노래가 오늘날 내 눈물버튼이 되는 그 순간. 스쳤던 찰나의 기억들은 어느새 명확한 그림이 되어있다. 십수년전에 내 인생을 이미 예측했다는 듯이, 흩날리던 가사는 오늘의 나를 비춘다. 그렇게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가사를 이해하며 나를 정의한다.



영화 <애프터 썬>의 소피도 아빠 캘럼이 궁금하다. 엄마와 헤어졌음에도 전화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행동이 의아하고, 어른인 아빠가 자신의 나이 때는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알고 싶다. 귀찮게해서 미안하지만 내 질문을 좀 들어줘야겠다. 어쩌면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어린 소녀 나름의 고군분투이기도 하다. 수영장 언니 오빠들의 스킨십이 궁금할 사춘기 소녀인데, 이별의 차가움과 허탈함을 먼저 경험했으니.


아빠를 알고 싶은 소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캘럼은 소피를 외롭게한다. 지난 밤 호텔파티에서 소피가 듀엣노래를 신청했지만, 끝까지 무대로 나오지 않는 캘럼. 속상하다. 아빠와의 시간은 이렇게 자주있는 일은 아닐텐데. 그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흐릿해질텐데. 아빠는 왜 내게 거리를 두는 걸까. 그럼에도 소피는 끊임없이 아빠를 두드린다. 물안경을 잃어버려 분위기를 망쳤을 땐 먼저 다가가 기대기도 하고, 야외활동 나온 패키지 여행객들에게 부탁해 아빠를 위한 생일 축하 노래도 선물한다.


분명 내 귓가에 들리는데, 감동이 찾아오는데, 이 노래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던 꼬꼬마처럼. 소피도 아빠라는 단어가 어렵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살 소녀가 만족할 대답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자세히 기억하려고 쓸데없는 질문폭격을 이어간 걸까. 다정한 관계를 캠코더에 한 컷이라도 더 담고 싶어서 자꾸 들이민 걸까. 소피는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정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캘럼의 딸’로서의 소피로.



# 부족한 정보를 얻을 방법은 오직

단 몇 개의 질문과 찰나의 리액션으로 상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당사자의 역사와 맥락을 파악하지 않은 판단은 금물. 위험하다. 성급한 오해와 편견은 간혹 여지없는 낙인을 찍기도 하니까. 허나 우리는 삼라만상을 알아채는 천리안이 아닌 걸. 한정된 정보를 적절히 배열함으로서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영화나 노래, 소설 같은 창작물도 우리에게 모든 낱말을 털어놓지 않는다. 한정된 시간안에 미주알고주알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걸 다 지켜볼 관객들도 피로하다. 결국 서로를 이해할 정보는 효율적으로 최소화시켜야 하는데, 그럼에도 작가가 집중한 감동은 전달돼야 의미가 있겠지. 그래서 영상작가들은 1차원적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기술을 사용한다. 단순한 기억 조작을 활용해 관객에게 원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상편집 이론, 바로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다.


소련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인 레프 쿨레쇼프가 고안해 낸 편집 기법. 같은 이미지를 보더라도 앞뒤로 붙는 이미지에 따라서 주인공을 향한 관객의 감정이 달라진다는 이론이다. 그가 제작한 짧은 영상에선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 사이사이마다 음식, 여성, 관 속의 사람 등 단순한 이미지를 삽입했다. 그때마다 관객은 영상 속 주인공이 허기짐, 애정, 슬픔을 느끼고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모두 똑같은 표정이었는데, 추가된 단 몇 컷만으로 그 사람을 이해해 버린 것이다.


Kuleshov Effect


혹자는 사람들 뇌를 조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소름돋아하기도 한다. 감독이 일부러 배열한 컷에 감정이 주입된것이라 해도 뭐 어때. 캐릭터의 서사를 이해하기 쉽도록, 옆에서 필요한 것만 쏙쏙 1타 강사 해주는거니까. 그러나 실제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 조물주의 힌트없이 어떻게 서로를 납득하겠어. 빈칸이 그렇게 많은데 말야. 컷과 컷 사이를 이어주는 숨은 화면을 무시하면 상대를 절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카펫에는 전부 다른 사연이 담겨 있어요. 그 위에 그려진 상징과 문양이 각각 다른 걸 나타내요”


양탄자의 퀄리티를 자랑하려는 가게 주인 아저씨. 한땀 한땀 오갔던 바늘 길에 그림의 진짜 자취가 묻어있는 것이란다.


“40살의 내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30살이 됐을 때도 깜짝 놀랐고요”


배 위에서 처음보는 사내에게 털어놓는 캘럼의 소회 역시 비슷한 감상이다. 오지 않은 미래는 아무리 쥐어짜도 직접 역사를 쌓아가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


이처럼 앞 뒤 한두 컷으로 어찌 한 인생을 스케치 할 수 있으리. 소피 역시 자신의 일부를 정의하기 위해 아빠의 단편을 긁어모았지만, 그의 속사정으로 들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번쩍번쩍한 클럽 조명에 감춰진 캘럼의 표정만으론, 그의 심경을 분간해 낼 수 없는 것처럼.


소피의 노력만큼 한걸음 나와주지 못한 캘럼. 아빠의 현실을 넘겨짚기엔 아직은 부족했던 소피. 그렇다고 단념하거나 실망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에 대한 백 퍼센트 확실한 정보를 얻는 건 애초에 욕심이니까. 내 기억 속 너의 모습을 모아서 어찌저찌 이어본대도, 결국 반쪽자리 납득인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경로를 바꿔보자. 부족한 소스를 억지로 붙여보는 대신, 그 공백을 채우는 쪽으로. 그런데 뭘로 채우지.


소피의 촬영본을 다시 돌려보자. 분명 남아있는 이야기가 있을거다. 화면 너머 흘러지나간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 이건 내 마음에만 녹화해 둘게” 소피의 계속된 인터뷰 쇼에 피로함을 느꼈던 캘럼. 그런 아빠의 난처함을 느낀 걸까. 씩씩하게 캠코더를 거두면서 불편함을 다독인다. 서툴게 카메라를 움직이는 와중에도 피사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한껏 들어있다. 등장한 사람만큼이나 이야기를 품고있는 이가 분명 있었다. 바로 작가 자기작신이다. 이젠 소피의 질문이 바뀔 차례다. '캘럼의 딸'이기 전에 먼저 증명해야할 대상, 즉 ‘소피’ 자신을 정의하는 것으로.


물론 아빠에게 자신을 비춰 곱씹을 만한 인생이 쌓이려면 시간은 걸리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장면들만 늘어놓은 터라 해석에 부딪치기도 하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아빠도 내 자신도 이해가 어렵더라도 너무 풀죽어 있을 필요는 없다. 오래된 테잎을 꺼내봤을때, 그 안에 환하게 웃고있는 시절이 눈물버튼이 될 날은 분명 올테니까.



# 어느새 당신은 내 선크림이 되어서

놓쳤던 작은 목소리가 있을까 부녀의 여행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카메라 속에 스쳤던 소피의 속마음처럼, 이번엔 속을 꽁꽁 싸맨 캘럼이 전해주고자 했던 마음도 조금씩 들린다.


“우리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네가 원하는 곳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네가 원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될 수 있어”


자기 전 잡담을 주고받는 부녀. 소속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캘럼은 소피의 인생을 격려한다. 11살이 듣기엔 자장가같은 다독임일지 모르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이 슬쩍 묻어있다. 보편적인 가정을 감당하기엔, 세상에 있는 그대로 부딪치기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폭풍같은 삶. 경계를 버티다 외톨이를 자처한 그는, 소피의 인생만큼은 단단하길 바란다. 그런 응원의 마음이라면 캠코더를 24시간 돌릴수 있게끔 곁에 있어주면 얼마나 좋으리. 한마디 조언으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다면 좌절이랄게 어디 있겠어. 그러나 소피의 아빠로서 필요한 추가장면을 전하지 못할걸 알고 있기에, 캘럼은 조그맣게나마 한걸음 내밀어본다.


여행 초반, 호텔 방에서 갑자기 시작된 호신술 강의. 심심해서 진행하는 레크리에이션 수준이 아닌 혼낼 듯이 가르친다. 그 엄격함을 걷어내보니, 앞으로 함께 있어 주지 못할 미안함이 스친다. 수영장에선 매시간 소피에게 선크림을 발라준다. 소피는 스스로 할 수 있다며 닿지 않는 등에 손을 퍼덕인다. 캘럼은 그런 소피를 물끄러미 보다 몸을 돌려 마무리를 해준다. 태양에 피부가 다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여행은 아빠를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최선을 다해 아빠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모든 질문은 자신을 정의하기 위함이었다. 빈공간을 남긴 채 작별해야했던 그날의 노력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 장면을 빗댈 내 역사가 아직 그려지지 않았던 것일뿐. 언젠간 불현듯 침대 속에서 그 곤경과 아픔을 이해할 날이 올테다.


윗세대를 넘어서면서 나를 규정하는, 우리의 인생 여정도 이러하려나. 남은 건 그들이 남긴 가사를 이해할 만큼 인생의 교집합을 키우는 것. 그들도 부모가 처음인터라 보여줄 모습이 깜빡깜빡 잘려있지만, 그 사이엔 자신을 채워 넣어갈 일일 테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감상이 휘발될 것 같을땐, 여전히 손이 닿지 않는 등의 한구석을 느껴보자. 아무리 닦아내도 끈질기게 붙어있는 아빠가 발라준 선크림이 날 지켜주고 있을지 모르니까.










# 많은 사람들이 모인 파티장에서 아빠에게 듀엣을 요청했던 소피.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무대에 내려가겠단 용기가 대단하다. 아빠와의 추억을 만들고 싶단 그 일념 앞에선 어떤 장애물도 보이지 않나봐. 아빠는 나오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그 노래는 바로 <Losing My Religion>. 자제력을 점점 잃어간다 느끼며, 좌절과 불안함을 되뇌이는 가사. 알고 싶지만 어렵고, 다가가지만 벽이 있는 소피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더욱 애절하게 들린다.


헌데 영화를 볼 땐 몰랐다. 노래를 부른 R.E.M의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도 캘럼과 같은 내적갈등을 겪었다는 것을. 아마 이 음악이 가진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캘럼이 사람들 많은 가운데 소피 옆자리를 지켜주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겠지. 그저 속으로 '거참 뭐가 어렵다고 딸아이 혼자 노래부르게 놔두나' 하고 삐죽댔는데. 역시 내가 알고있는 앞뒤 사정만으론 한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배울것이 많다.


노래를 다시 들으니, 캘럼의 아픔이 전해진다. 참으로 정보의 노예로세. 쿨레쇼프 효과는 대단해.



https://youtu.be/xwtdhWltS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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