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밀라노의 한 정신병원 협동조합. 이곳은 정신병원 폐쇄운동을 주도한 ‘바자리아 법’에 의해 운영되는 병원 부속기관이다.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 시스템을 문제 삼으며, 환자에게 자생의 기회를 열어주려는 취지는 좋다. 허나 서류상의 텍스트가 시대정신을 뒤엎기엔 잉크 마를 시간이 필요한 법. ‘협동조합 180’은 담당 의료진의 규제 아래 단순노동만 반복하며 오히려 무력감에 빠진다.
어느 날 ‘협동조합 180’의 관리자로 활동가 넬로가 부임한다. 급진적 활동가인 그는 강골한 가치관 덕에 현장에서 외면받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 식지 않은 넬로의 열정은 공허한 협동조합과 만나 새로운 불씨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름뿐인 자유를 극복하기 위해, 서툴지만 나무 바닥 시공업에 도전하는 넬로와 조합원들. 작업이 쉽지 않은 건 안다. 여전히 세상의 규칙은 어색하고, 주위의 시선도 따갑다. 하지만 이들은 크고 작은 소란이 가로막아도 바닥재를 붙여나가기로 한다. 자신들을 닮은 나무판자들이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내리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 거대한 정신병원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
비루한 환경일지라도 노력 여하에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속담, ‘개천에서 용 난다’. 이젠 현대 한국어에서 탈락할 위기에 놓여있다. 물론 개천에서 주야장천 용들이 솟구쳤다면, 속담으로 만들만한 일은 아니었겠지. 애초에 어려운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종종 누군가의 헤드라인으로 활용된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불모지의 성공 신화는 어쨌든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지금은 어림없지.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은 애꿎은 격언 사전을 정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세상의 야속함 때문일까. 특별한 날카로움이 결국 주머니를 뚫고 나와 진가를 보이는 이야기에 쾌감을 느낀다. 그 주머니가 두꺼울수록 역전극은 도파민을 폭발시킨다. 그러나 영웅담은 디지털 세계에 갇혀있을 때 빛이 나는 건가 봐. 심장이 뛰기 전에 현실의 뇌세포가 감동을 칼차단한다. 실전은 영화랑 다르다고. 적당히 순응하며 살아가자고. 그러다 보니 숨겨진 예리함을 이르던 고사성어, ‘낭중지추(囊中之錐)’ 역시 현실의 풍파에 본래 의미를 깎아내기 시작한다.
“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최규석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송곳>의 대사. ‘기어이’ 내딛는 한발이 분명 용기 있게 보였는데, 언젠가부터 만류하는 듯이 들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세상의 규칙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현명하게 보인다. 일반적이라 정해놓은 삶의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여지없이 날아드는 비정상 딱지. 그 낙인은 내 안의 송곳을 꽁꽁 감추게 하는 레드카드가 된다. 게다가 나만의 뾰족함은, 갖고 태어난 무기라기보단 살면서 부러진 탓에 생긴 거친 단면일 때가 많다. 그러니 튀어나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거겠지. 무력함은 숙명이 되는 거겠지. 마치 ‘협동조합 180’에 웅크린 채 그저 흘러가는 사람들처럼. 일반인에 가깝게 만들어줄 투약시간만 기다리는 환자들처럼. 어라, 어딘가 익숙한 이 기분은 뭐지.
# 부서짐의 미학
세상은 늘 완전한 것을 원한다. 공장에서 일관되게 잘려서 제공되는 나무판자 마냥, 틀에 꼭 맞게 정렬되어 있어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물론 주머니를 뚫고 나온 뾰족함이 누군가를 해친다면 제재가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엔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수일 터다. 하지만 기성품을 만드는 틀에 억지로 맞추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교육과 보호를 제공한다는 대의는 간혹 개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되고 만다. 타일이 바닥에 똑같이 들어맞아야 관리가 쉽다는 이유로. 시절이 만든 나의 모양은 올바르지 못하다는 탓으로. 그렇게 우리는 시대가 지향하는 ‘보통 사람’을 꿈꾸기로 한다.
‘협동조합 180’이 구성원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병원이 정해준 ‘환자’라는 타이틀은 자신의 위험성만 발견케 하며 약에 의존하게 유도한다. 그 덕에 파비오는 회계사인 아버지처럼 셈에 밝지만 쉬지 않고 말하는 떠벌이에 그친다. 지죠는 뛰어난 디자인 실력을 지녔음에도, 편지 봉투에 우표를 붙여 만든 애니메이션 유희에 만족하고 만다. 기술 좋은 루카는 약이 없이는 잠을 조절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자기결정권을 장려하며 협동조합 내에서 사업을 꾸리게 해줬지만, 진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교묘히 세팅된 세계. 정신병동이 그들에게 준 것은 안정이 아니라, 바로 한계였다.
이에 영화는 반쪽짜리 응원으로 사고를 제한당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려 노력한다. 좌천당했지만 여전히 열정 넘치는 활동가 넬로. 그는 조금 다를 뿐 불량품이 아니라며 우리의 능력을 보여줄 일을 해보자고 독려한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며 막연한 희망을 불어넣었다면, 이 영화의 제목인 <위 캔 두 댓!>에 실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넬로는 사람들의 손을 무작정 들어 올리기 전에, 한 가지 단계를 거치기로 한다. 바로 자신의 손이 가진 힘을 체험하게 하는 것.
영화 초반, 사람들을 둥그렇게 불러 모은 넬로는 한 사람씩 질문한다. 협동조합에서 새 사업을 시작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부족하단 이유로 정해주는 대로 살다 보니 의견을 청하는 게 생소할 터. 허나 듣고자 하는 시간이 열리자, 각자의 경험과 할 수 있는 능력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깊이가 어떻든 간에 경청하는 시선만으로도 존중받는 기분도 든다. 꽤 쓸모있는 대답이 내 주머니 안에도 있었네. 박살난 파편인 줄 알았는데.
이에 넬로는 한 걸음 더 나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바로 1인 1표를 통한 의사결정. 그저 돌봄의 대상이라 삶을 이끌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은 놀란다. 우표를 붙이고 약을 먹는 데에만 사용됐던 보조기구인 줄 알았는데. 번쩍 든 내 손에 결정을 좌우하는 힘이 있다니. 어리둥절했던 그들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이미 부수어진 모습일지라도,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통’의 기준에 갇혀있다가 의사결정권자로 자각하는 순간은 인생의 큰 도약이다. 누가 뭐래도 내딛는 방향은 스스로 정하겠단 열의가 생길 터다. 새장 속에선 하늘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을 테니까. 문제는 여전히 걸음마다 요구받는 조건들이다. 발을 뻗어볼까 하면 네모반듯한 시대의 규칙이 자를 가져다 댄다. 불량품 레이더에 걸리면 즉시 폐자재 더미 행이다. 병동 원장 델베키오가 “당신은 환자들을 단지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찬물을 끼얹어도, 왠지 감정적 반박밖에 할 수 없다. 의지만으론 규격 탈피의 외침은 소용이 없는 걸까.
영화 <위 캔 두 댓!>도 동일한 위기를 맞는다. 경력직에 비해 서툰 실력이라 일이 느려 인건비가 불리하고, 의사소통도 쉽지 않아 협업도 애먹는다. 클라이언트의 배려에 기대는 건 한계가 있다. 동등한 의사결정권이 있는 존재가 되고자 했는데, 오히려 조각난 처지를 더 확인한 셈이려나. 때마침 바닥공사에 필요한 자재마저 모자란 상황.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중단하고 다시 눈을 가린 채 병동의 케어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방식을 찾을 것인가.
그 순간, 그들은 버려진 폐자재를 바라본다. 제각각 다른 크기와 모양. 누구도 쓸모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잉여물. 하지만 그 조각들을 하나둘 맞춰 나가다 보니 예상치 못한 패턴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거칠게 조각난 자리는 다른 자재가 맞닿을 빗면이 되고, 두 조각 사이의 여유는 작은 조각이 머물 공간으로 거듭난다. 기성품으로만 바닥을 깔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신비함. 서로의 틈을 메우면서 만드는 단단함. 그들이 선택한 바닥은 단순한 배열을 넘어, 새로운 질서가 됐다. 서로 다른 형태가 어우러지는 조화. 시대가 요구하는 정돈된 틀을 따르지 않더라도, 빈 곳을 채우며 나아갈 수 있다는 증명. 영화는 그렇게 손짓한다. 당신의 조각은 세상을 이루는 모자이크가 되기 충분하다고.
#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이처럼 작은 힘이 모여 허들을 넘어서는 감동은 언제나 환영이다. 실화가 바탕이 됐단 사실은 관객에게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환자로만 남길 바라는 정신병동을 연대의 힘으로 보란 듯이 떠나는데, 박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지. 게다가 영화의 배경이 된 ‘바자리아 법’은 장애 인권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마저 한다. 여기까지 만으로도 이야기의 목적은 달성했나 싶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모습까지 비추는 시도를 한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모인 조합이라고!”
“제정신인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영화 중반, 지죠와 호감을 주고받던 젊은 클라이언트는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에게 되묻는다. 네가 내세우는 제정신의 기준은 누가 세운 것이냐고. 엘리트 교육을 받은 우리는 부러진 부분이 전혀 없냐고. 감독은 그녀의 입을 통해 불완전하고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분짓던 인간 사이의 선을 모조리 지운다. 영화 후반, 여자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버벅대는 지죠에겐, “그건 누구든 마찬가지”라며 안심시키는 그녀. 완벽한 보통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따뜻함이 전해진다. 누구나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기에. 혹은 이미 우린 부서져 있기에.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우리에게 주어진 정신 질환 시트를 되돌아보고,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어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카 역의 지오반니 칼카뇨 역시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의미를 돌아본다. 그럴듯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지만, 누구나 폐자재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 불편한 진실은 영화 내내 규칙을 리드하던 캐릭터들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환자의 안전이란 이름 아래 폐쇄적인 병동을 유지하려는 델베키오 박사를 보자. 환자를 대하는 그의 우려는 진심일 것이다. 무수한 데이터가 가리키는 사실은 분명 존재하니까. 하지만 어떠한 시도도 무시한 채 본인의 데이터만 고집하는 태도엔 그가 놓지 못하는 날카로운 파편이 스친다. 이 바닥 권위자라는 자존심. 자신은 틀릴 리 없다는 오만함은 병동을 위태롭게 하는 근원이 된다.
정의로움을 외치는 주인공 넬로도 마찬가지.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계획에 꽂히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 오히려 가까운 주변을 외롭게 만든다. 반성도 대의 앞에선 부스러기가 되어버린다. 부서진 모습도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가 있다던 그의 설득은 어떠한가. 폐자재로 완성한 바닥을 처음 보고서 규격에 맞지 않다며 분노할 때 그 의미는 퇴색된다. 자유를 내세우면서도 본인의 규칙에 사로잡히고 마는 넬로. 그동안의 설움을 전복시키려는 자격지심이 비친다. (본인의) 옳음 앞에 좁아진 시야는 또다른 가스라이팅을 낳고 만다.
결국 눈에 드러나는 부족함만이 자재의 모양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깎아냈다 자부해도 마찰력 가득한 세상이라 작은 틈은 생기는 법. 영화는 이처럼 어느 순간 여지없이 드러나는, 인간이기에 당연한 균열에 집중한다. 보통이고, 평범하고, 중간은 해온 인생이니 작은 부서짐은 목공풀로 감춰놓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 <위 캔 두 댓!>은 우리의 마음속 주머니에 꽁꽁 숨겨놓은 거친 단면을 불러낸다. 완벽한 자재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세월에 깎이고 거칠어진 모양이 오히려 솔직하다고.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뾰족함이니 배 째라는 식으로 뻗대자는 건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그 인생 조각의 빗면을 세심하게 느끼길 기대한다. 환자들의 상태가 나아진 걸 발견하고 자신의 독단을 철회하는 델베키오 박사처럼. 경주마같은 정의로움은 위험할 수 있다며 처절히 반성하는 넬로처럼. 거칠고 부족한 인생의 단면을 인정하길 권한다. 나의 모양새를 알아야 언제라도 기댈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 조각난 모양을 필요로 할 때 선뜻 내 어깨를 빌려줄 수 있을 테니까. 영화는 그렇게 '낭중지추'가 사라져 아쉬운 시대에 새로운 뜻을 불어넣어 준다. 주머니를 뚫고 나올 예리함을 넘어,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이룰 너의 작은 모양을 잘 간직하길 바란다고.
'협동조합 180'의 첫번째 작품이 되었던 별모양 모자이크. 반듯한 모양새를 이루지 않았어도 더 반짝였던 이유가 그곳에 있나보다. 나도 언젠가 쓰일날을 기다리며 주머니에 잘 넣어둘게요.
# 캐나다 출신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레너드 코헨. 1992년에 발표한 곡 anthem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다. 빛은 그 틈으로 들어온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인간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 틈으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그의 노래.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며 무지성 독려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감사한 문장이야. 그 틈으로 바람도 들어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동력이 되는 문장이야. 목소리가 기가막혀서 그런걸까. 어쨌든 내 틈으로 빛이 들어오려면 햇볕을 쬐러 바깥을 나가야겠지. 집안에만 있지말고 바람 좀 쐬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