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덴마크의 작은 도시. 이곳엔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하고, 학교 선생님으로서도 무기력한 한 남자 마르틴이 살고 있다. 태도를 지적하는 학부모의 비난도, 소통의 길을 찾기 어려운 아내와의 대화도 이젠 그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황. 오직 숨통이 트이는 건 자신과 닮은 동료 교사들과 만날 때뿐이다.
어느 날, ‘알코올 농도를 0.05%로 유지한다면 삶이 전반적으로 나아진다.’는 한 정신과 의사의 이론을 알게 된 마르틴과 친구들(페테르, 톰뮈, 니콜라이). 이들은 그 이론을 테스트해 보자고 의기투합한다. 효과는 굉장했다. 생기 없는 일상에 얹어진 활기 한 모금은 잊고 살았던 열정을 되찾게 한다. 일터의 평판과 가족의 신뢰가 회복되는 걸 느끼며 이론을 검증한 네 명의 권태로운 인생들. 여기서 멈출 순 없는지, 교사라는 정체성을 빙자해 한 발짝 더 나아간 새로운 증명에 도전하기로 한다. 알코올이 우리를 정말로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
# 통제가 권태를 만든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우리의 손에는 늘 채찍이 들려있었다. 실제 눈에 보이는 회초리이기도 했고, 보이지 않게 압박하는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형태는 달라도 슬로건은 동일했다. 고이면 썩어버리고, 제1의 덕목은 성장이며, 모든 건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혼을 냈다. 1보 후퇴는 반드시 2보 전진을 요구했고, 멈춤은 도태의 시작인 숨 막히는 현실. 그렇게 우리는 달리고 있다. 목적 중심 세계관에 언제 올라탔는지도 모른 채.
인간은 시간선 위에 살고 있기에 어제보다 나은 나를 탐하게 되는 건 당연지사. 한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공허함이 불쑥 찾아온다. '결과를 이뤄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목표를 이룬 후엔 그다음은?' 성취는 어느새 숙제가 됐고, 만족의 유효기간은 점점 짧아졌다. '열심히 달리는 나'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믿게 되는 순간, 그때부터 두 다리는 서글퍼진다. 끝없이 펼쳐진 트랙 위에 위기감을 느낀다. 왜냐면 지금껏 달려온 노력은 박수칠 게 아니니까. 평생 내디뎌야 하는 인생의 의무니까.
"정신력은 체력의 담보 없이는 구호밖에 안 돼"
웹툰 ‘미생’ 속 장그래의 스승이 한 말처럼, 물리적 힘은 삶을 이끄는 연료가 된다. 세상의 훈장질에 이리저리 차여도, 든든한 밥 한 그릇에 채찍자국은 금세 딱지가 진다. 그러나 그것도 효율 좋은 젊은 시기의 이야기. 특별한 관리가 없다면 에너지 공장은 서서히 녹이 슬기 마련이다. 차갑고 날카로운 독려에 부응할 근육은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의욕의 근손실. 고주망태가 되어 놀았더라도, 눈을 뜨면 온몸을 던지며 춤을 췄었는데. 이젠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만 해도 무릎을 짚어야 하네. 진짜 위기는 눈앞의 경기장이 아니었어. 달리기에 권태를 느껴버린 중년의 다리. 공포는 구호뿐인 정신력에 깃들어 있었다.
내 다리가 어찌 됐든 세상의 채찍질은 멈추지 않는다. 생기로움은 우상화되고 독려의 박수는 정신을 통제한다. 신발끈을 다시 바짝 조이라는 휘슬이 귓가에 맴돈다. 다음 목표는 잠시 미뤄놔도 된다는 옵션을 들어본 적 없는 현생인류. 불안해할 기운도, 박차고 일어설 힘도 부족한 이들의 선택은 단 하나다. 그냥 머릿속 전원을 꺼버리는 것. 만족에 대한 욕심도, 실패에 대한 걱정도, 주변인과의 소통도 모두 제거된 무감정의 우주로 숨어 들어간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주인공 마르틴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수려한 외모에 재즈 발레도 능통해 늘 인기가 많았던 그가, 이젠 학생들이 수업을 무시해도 대꾸 없이 지루한 교육을 그저 이어간다. 학부모 위원회에 소집돼 교육 태도를 지적받자, 그렇다면 그냥 선생을 바꾸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삶에 대한 의욕상실은 직장을 너머 가족 간의 무너진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혹자는 그저 순간을 회피하는 중년의 이기적인 해결방법이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마르틴에겐 꺼져버린 불씨를 헤집는 꼬챙이와도 같았을까. 성장 중심 세계관으로 오랜 시간 통제되었던 중년의 삶. 잡아 끄는 손을 뿌리치려면 모든 게 소진됐다는 걸 알려야 했다. 권태로움에 빠져 주변의 맥을 끊는다 손가락질받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전원을 끄는 것만이 생존을 위한 특단의 위기 탈출법이기에.
# 보호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보호
마르틴의 태도는 어찌 보면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초월한 도인의 단계로 보이기도 한다.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감정의 높낮이가 없이 흘러가니까. 그러나 영화 <어나더 라운드>를 연출한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은 통제를 피해 선택한 권태로움 역시 또 다른 통제로 여겼다. 알 속에 또 다른 알을 만든 이중 방어 구조. 중앙에 자리 잡은 자아는 단단한 껍질에 보호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부화하지 못하고 단백질의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랄까.
더욱 정확한 의미는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 한 영상에서 찾을 수 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2 Incredible Drunk Men>이라는 짧은 유튜브 콘텐츠. 영상에는 제목 그대로 거나하게 취한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내용은 별거 없다. 취한 두 남자가 자전거에 통나무를 실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전부다.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지기도 하고, 추워 보이는 날씨에도 웃통을 벗으며 에너지를 발산한다. 심지어 왜 저러고 있는지, 목적도 알 수 없는 기괴한 영상이다. 그러나 빈터베르 감독은 이 엉망진창인 3분여 시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넘어질 때 손으로 머리를 보호하지만, 술에 취하면 안전장치가 없음에도 그냥 머리로 넘어진다. 그리고 당신은 그걸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나사가 헐거워진 듯 느슨해진 틈으로 텁텁한 공기를 순환시키는 인생의 묘책. 제정신이라면 두 다리 딱 붙이고 요지부동이었을 텐데, 사라졌던 불씨는 어느새 농막을 뜨겁게 지핀다. 영상 내내 같은 자리를 맴돌지만, 이들의 도전은 어떤 발전도 이루지 않지만, 그건 아무런 절망이 되지 않는다. 성취와 진전만이 박수받는 통제된 사고방식의 족쇄를 과감하게 해체하고, 공기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두 남자. 이것이 바로 세상의 압박에 스스로 전원을 꺼버린, 마르틴과 친구들에게 필요했던 한 걸음이었다.
영화는 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하는 첫 실험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마르틴의 역사 수업은 과감해지고, 페테르의 음악 수업은 유머러스해지며, 톰뮈의 체육 수업은 열정이 넘친다. 효과를 톡톡히 본 중년 4인방은 "중독자라면 우리처럼 컨트롤하면서 마시지 못한다"며 기존 이론을 넘어서 두 번째 실험을 시작한다. 각자 알코올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니, 최고의 수행 능력을 발휘시키는 최적의 알코올지수를 찾자는 도전. 이게 무슨 나이 먹은 사람들이 신나 할 상황인가 싶지만, 인생의 슬로건은 창고에 처박아 놨던 이들이라 마냥 응원도 된다. 자전거에 통나무를 싣다가 자빠지는 정도라면야 뭐 어때. 그 정도 활기참은 귀엽게 봐줄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의 건배가 늘어날수록 영화는 관객의 심장을 조여 온다. 교육 현장에서 알코올 농도가 올라가는 모습은 위태롭다. 니콜라이의 아내 심부름으로 다 같이 방문한 마트에서 벌어지는 슬랩스틱이 창피하기도 하다. 마약 복용 혐의로 재판에 서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던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와 사강의 주장 앞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가 있었듯이, 무분별한 해방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딘가 한쪽이 불편해진다. 감독은 관객의 눈살을 이미 염두했다는 듯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영화를 보고 술이 잘 팔리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덕성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는 빈터베르 감독. 그는 먼저 0.05%의 해방감으로 캐릭터와 관객의 기분을 한없이 올려놓는다. 그 즐거움도 잠시, 순수함과 추악함이 섞여 있는 괴생체를 마주시켜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결국 감독의 의도는 음주의 도덕적 토론이 아닌, 껍질이 해체된 날 것의 인간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 질문하고자 한 것. 자유로움이 통제와 통제로 점철된 우리를 위로해 준다지만, 그 시작은 숨겨놨던 모습을 마주하는 것부터라는 듯이.
# 그래도 실패까지 나였으니까
사실 말이 쉽다. 낱낱이 발가벗겨진 자아를 받아들이기엔 세상의 기준이 한없이 올곧다. 성공과 경쟁 사회에서 실패는 관대하지 않고, 다음 스텝을 위한 타이머는 늘 켜져 있다. 규격화된 상자 안에 몸을 밀어 넣고는 웃는 얼굴로 매대에 오르려 애를 써야 하는데, 불안하다. 0.05%의 도움으로 에너지레벨을 올린다 해도, 창피함과 후회를 버틸 자신이 없다. 그래서 더 움직이지 않고 머릿속 코드를 뽑아버리는 선택이 어찌 보면 합리적이라 생각했겠지. 그럼 중년의 권태는 인간의 바이오리듬 상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인 걸까. 감독은 관객들이 아쉬워하며 떠올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키에르 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실패라는 관념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라고 했죠. 타인과 삶을 사랑하려면 자신의 실패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해요"
영화 후반부에 치러지는 철학 구술시험. 떨어질까 불안에 떨고 있는 학생의 입으로 들어서 그럴까. 많은 일을 겪고 현실로 돌아온 마르틴과 친구들이 떠올라서일까. 복잡하기도 한 철학적 문장은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불안보다 더 중요한 건 실패의 경험이고, 자유로움은 그 두려운 가능성까지 포함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이는 "운명은 우리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면, 좌절과 실망이 필연적일 것이다"라고 전하는 세네카(스토아 철학자)의 철학과도 닮아있다. 조금 세게 해석하자면, '좌절하는 인간은, 좌절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 오만한 판단미스’라 볼 수도 있을까. 반듯한 성공이 늘 찬사 받는 시대라 실패 가능성을 받아들이라는 말에 마음이 쉽게 동하지 않을지 모른다. 경직된 세상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살려다가, 실패를 용납하지 못해서 자멸하지 않길 바라는 넋두리라 생각하면 조금 낫지 싶다. 마르틴의 수업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세상은 결코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학생들은 졸업한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찰나의 기쁨을 즐기고 있지만 마주칠 벽들이 무수할 예정이다. 하지만 마르틴은 이제 막 발을 떼는 학생들에게, 그동안 추지 못했던 재즈발레에 몸을 맡기며 세상을 사는 법을 진솔하게 표현한다. 분명 겁나는 세상이지. 매일이 실패의 연속일 테지. 그러나 조금은 느슨해도 된다고 온몸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 위로 몸을 날리는 마르틴에 고개를 끄덕이다보니, 되지도 않는 통나무를 자전거에 올리겠다 휘청이던 사내들이 단순히 우습지 않게 보인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부담 없이 덤벼보는 것. 옆 사람의 속도와 방향과는 슬쩍 다르더라도 조급하지 않고 넉넉해지는 것. 그것이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0.05%의 마법이었나 싶다. 통제에 묶여 몸이 굳었다면, 0.05% 정도는 너를 미치게 만들어도 된다고. 그것이 술이 되었든 춤이 되었든, 아니면 네가 정말 빠져들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서. 어차피 실패는 늘 함께니까.
글을 다 쓰고 나니 지난밤 숙취를 비난할 수가 없네. 금주령 다시 풀고 오늘도 한잔해야겠음. 실패를 받아들이는 인생이 이것이렸다.
# 감독이 모티브를 얻었다는 영상을 다시 보니, 영락없이 내 친구들이 떠오른다. 함께 얘기하면 동시에 떠오른 몇 장면들이 분명 있을 터다. 갈수록 미친 짓을 덜하게 되는 게 성숙하고 어른스러워짐의 증거라고 하는데. 그렇다기엔 나는 여전히 고등학생 텐션에 머물러 있는걸. 결국 에너지가 부족해서 도른자의 전원을 잠시 내려놓은 거라고 봐야지. 철들면 죽는 거라고 했어. 장수의 비결이 여기에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