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일본의 어느 마을. 디자이너로 일하는 나루미는 기이한 현상을 겪는다. 행방불명이었던 남편 신지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 가부장적이면서 때때로 공격적이었던 신지가, 다정한 목소리에 유순한 얼굴이라니. 게다가 그녀를 ‘가이드’라 부르며 이 세계를 학습하려는 기묘한 행동에 당혹스럽다. 하지만 더욱 혼란스러운 건 따로 있다. 신지답지 않은 신지가 제정신을 찾지 않길 바라는 마음. 설레는 자신이 미워진다.
한편 옆 동네에선 일가족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기자 사쿠라이는 현장에서 수상한 남자아이 아마노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은 외계에서 왔으며,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키라 역시 외계인이라는. 침략을 위해 지구인의 개념을 수집하고 있다는 주장이 어이없지만, 특정 개념을 빼앗긴 사람들을 보며 점점 공포를 느끼는 사쿠라이. 외계인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어느새 그들을 돕고 있다. 그렇게 나루미도, 사쿠라이도, 그리고 세상도 조용한 침략이 시작된다. 빼앗기는 줄도 모른 채.
# 침략의 보편성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소녀가 잔소리와 충고의 차이를 짚었다. 짧지만 강렬한 한 마디. 명언으로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아마도 무분별한 침범의 시대에 충고가 지닌 공격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터다. 애정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란 전제는 중요하지 않다. 대개 충고는 내가 구하지 않을 때 비집고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공존을 말하지만, 침략은 언제나 일어난다. 누구도 선을 넘는 것에 찬성하진 않아도, 어쩌면 이미 갈등의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가 공중화장실을 청소할 때마다 급하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분명 바깥에 ‘청소 중’이라는 팻말이 놓여있는데 무용지물이다. 그럴 때마다 히라야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화장실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하다. 급한 일을 해결하는 것. 인생에 경보가 울리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조용한 삶의 틈을 가르는 작은 침입들. 단순히 히라야마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리라.
개인사를 넘어 공동체와 국가로 시야를 넓혀보자. 생존을 위한 분쟁, 권력을 위한 전쟁, 그리고 지배를 위한 개입.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며 끊임없이 세를 강화하고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던 로마 시대의 병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니, 서글픈 현상인지 대단한 전략인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내가 만든 질서를 따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나의 세계는 넓어진다. 그러면 더 이상 위협받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침략은 삶의 도구가 되었다.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속 외계인의 목적도 지구 침략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역을 넓히려는 목적이겠지. 그동안 지구에는 다양한 외계 세력이 쳐들어왔다. 그리고 만만하게 봤는지, 자신들의 물리적 힘을 앞세워 지구를 폐허로 만들려고 해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인간의 저항은 예측을 넘어섰고, 양측에 커다란 피해를 줬다. 이런 실패 사례들을 분석한 걸까. 영화 <산책하는 침입자>의 외계인들은 이제껏 봐왔던 패턴과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한다. 바로 인간이 사회적으로 형성한 가치, 삶을 유지하는 관념이 무엇인지 사전 조사를 하는 것. 인간의 특이점을 파악해 공격루트를 찾겠다는 의지일텐데, 생경한 방식에 의문이 생긴다. 나를 알고 적을 알고자 하는 손자병법이 대단한 건 알지만, 그런 정보만으로 이들의 무혈입성에 정말로 도움이 될까.
# 하나만 잃어도 무너지는 만큼
그에 대한 대답은 개념 습득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의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학습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강탈이다. “그 개념 받겠습니다”라며 분명 정중했단 말이지. 그런데 그 주문에는 인생에 구멍을 뚫는 무시무시함이 숨어있다. 이들이 찾는 개념의 형태가 물질이 아닌 가치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삶에서 특정 물질적 개념을 잃는다고 해서 생존이 위태로워지진 않는다. 대체가 가능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확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치적 개념을 잃는 순간,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삶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가족’이란 개념을 빼앗긴 아스미(나루미의 동생)는 더 이상 부모를 부모로 인식하지 못하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처럼 냉정하게 대한다. 외계인이 몸에 들어온 아마노는 부모로부터 ‘자유’의 개념을 빼앗는다. 그 결과 그들은 노예처럼 무기력한 존재로 변해버린다. 어떻게 이렇게 정서가 극도로 피폐해질 수 있는 걸까. 그저 개념 하나일 뿐인데.
“인간이 개념을 빼앗기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지고, 관계성이 파괴된다. 이는 가장 무서운 공격이다.”
원작 소설을 쓴 마에카와 도모히로가 인터뷰에서도 강조했듯, 개념의 강탈은 단순한 정보의 손실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유지케 하는 최소한을 빼앗는 행위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더라도, 적어도 공동체가 납득할 만한 표준화된 경향이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공감의 보폭을 조금씩 맞춰나가는 것이 인류의 메커니즘일 터다. 그러다 보니 보편적 개념이라 함은 인류를, 내가 속한 공동체를, 그리고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지침서가 되는 셈. 그런데 내 매뉴얼 특정 페이지만 깨끗하게 날아가 버린다니, 대화라는 게 될 턱이 없지. 영화 속 외계인들이 느긋하게 산책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 특정 시각을 가리는 것만으로 이미 침입은 시작된 것이었을 테니까. 음 그런데 왠지 모를 이 기시감. 개념의 칩입이 꼭 외계인들만의 공격은 아닌 것 같은걸.
영화와 소설 속에서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데 주목해보자. 이는 ‘평화’라는 개념을 상실한 현재의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노가 “우리는 지구를 침략하러 왔다”고 선언했을 때, 기자 사쿠라이는 외계인이냐는 질문만 할 뿐, “왜 침략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는 전쟁과 침략이 너무나 당연해진, ‘이해’라는 개념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현실과 닮아있다.
더욱 섬뜩한 것은, 사람들이 개념을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는 자각이라도 있으면 스스로 행동에 신경을 쓸 텐데, 원래 그렇게 살아왔다는 태도라면 답이 없잖아. 따라서 공동체를 위협하거나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개념이 없다”는 표현을 쓰는 건 단순한 비유가 아닐 터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바로 이런 개념 상실의 공포와 좌절을 극대화한다. 개념을 빼앗긴 모든 이들이 멍한 얼굴로 흘리는 한줄기 눈물은 그 절망의 크기를 실감케 한다. 가슴 한켠은 분명 뚫려있는데 무엇을 잃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상실감. 짠내 마저 날아가버린 눈물방울이 왠지 우리에게 경고하는 듯하다. 공허한 슬픔을 너마저 겪지 않길 바란다고.
인생을 흔드는 공포의 침략법. 하지만 그만큼 개념이란 건 복잡하면서도 개인적인 무게가 담겨있지 않나 싶다. 산책 중에 마주친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개념을 습득한다는 건 아마도 쉽지 않은 일일 터다.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다른 맥락과 감정이 덧붙여지니까. 그렇다고 발품을 팔며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산책하는 침입자>의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얻기 위해 묘수를 쓴다. 언어로 된 설명이 아닌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는 것. 개념을 얻게 된 경로는 다르더라도, 적어도 시대가 납득할 만한 보편적 경향을 바탕으로 마음에 그림이 그려질 거란 예측이다.
개념은 언어의 산물이지만, 개념을 설명하는 언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언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선명하게 그 개념을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언어에 기대지 않고 그 개념을 학습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개념을 이해하는 거야, 이해 그 자체를 가져오는 거지”
- 소설 <산책하는 침입자> p103
실제로 소설 속에서 신지는 ‘마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들이 ‘마음’을 이미지화할 때 단어 너머 존재하는 느낌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사람들이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만가지 이미지를 뭉쳐놓은 오묘한 감정이기에 그랬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나쓰미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서도, 선생님과 아내분, 화자인 나, 그리고 과거의 인물 K까지 서로의 마음 속 한 점을 이해하기까지 굉장히 오랜시간이 걸린 것처럼. 소중하면서도 거대한 관계의 감정은, 나이테가 짙어지면서 개념화될 일이다. 결국 신지는 ‘마음’이 무엇인지 습득한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추상적인 이해 그 자체만으로, 과연 ‘나루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까.
이처럼 개념의 넓고 깊음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성가대 장면을 추가한다. ‘사랑’을 노래하는 아이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 신지. 아이들은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 다양한 대답을 늘어놓는다. 이는 영화 <아는 여자>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가, 첫사랑이 없었던 동치성에게 저마다의 사랑론을 펼치는 장면과 유사하다. 모두가 다르면서 맞는 슈퍼개념. 사전적 의미를 백번 이해하더라도 결국은 모르는거나 다름없는 신지의 의아함이 여기에 있으리라.
“사랑은 누구도 이미지화할 수 없다. 부탁이니까 그런 거 뺏지 말아달라”는 나루미의 당부는, 하나만 잃어도 무너지는 만큼 누구도 쉽게 앗아갈 수 없는 단단함으로 들리기도 한다. 인간의 개념이란, 지식 충전으로 확보되는 게 아니라고. 간단히 주문을 외워 습득할 거리가 아니라고. 태어나면서 걸어온 발자취와 함께 성장하는 거라고.
# 인간다운 인간
역시나 타인의 경험만으로 익힌 개념은 한계에 부딪힌다. ‘자유’는 배웠지만, ‘반성’과 ‘죄책감’은 알지 못하는 아마노와 아키라.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 아무 감정을 못 느끼는 이들에게 자유는, 죄를 부추기는 도파민이다. 개념 자체에 문제는 없다. 이를 함부로 해석하고 쓰는 사람이 문제다. ‘소유’의 개념을 잃고 괴상하게 홀가분해진 마루오는 어떠한가. 집 밖을 벗어나지 않았던 그에게 소유란, 그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이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 우리의 개념 사전은 마치 지구에 막 도착한 외계인들처럼 빈칸투성이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감정을 발견하고, 관계를 맺고, 생각을 거듭하며 한 페이지씩 채워간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할수록 각각의 정의는 허술하다. 끊임없이 도전받고 무너진다. 그러나 내 안에 생각이 있는 건 확실하다. ‘사랑’을 묻는 신지에게 목사님은 거듭 이야기한다. “사랑은 당신의 내면에 있다”고. 모르는게 아니었다. 그저 두근대는 마음을 언어화할 도리가 없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개념을 성장시킨다. 뭐가 되려고 그렇게 산책을 나가냐는 나루미의 물음에 신지는 대답한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p126)라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개념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부딪치고 경험하면서 현장에서 다듬어 나가야 한다고. 앞서 말했듯 살아온 경험에 따라 저장된 이미지도, 그것을 설명하는 언어도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보편적 개념’과 ‘개인적 개념’을 비교하며 개념을 정의할 힘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모든 성장을 스스로 해야 한다면 너무 벅찬걸. 그래서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는 가이드의 중요성을 짚는다. 물고기에 불시착한 탓에 결국 살인사건까지 만들게 된 아키라. 적절한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그녀는 기술적인 인간행세만 했을 뿐이다. 사쿠라이 역시 특종을 위해 개념 습득을 퍼포먼스처럼 다룬 터라, 아마노가 올바른 개념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반면 신지는 달랐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에 닿으려는 의지가 생겼다. 침략에 사용할 도구로서 개념만 얼른 모으면 됐을 텐데 조화로운 대처를 시도하기도 한다. 혼자서는 어림없는 발전이겠지. 그 성장은 아끼는 마음으로 곁을 지켜준 나루미 덕분이다. 인간(人間)이란 뜻 속에 ‘사이’를 포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숙제다. 개념을 또렷이 정의하지 못하는 것도,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든 침입은 도사리고 있고, 내 삶을 지키기에도 바쁘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처럼 완벽한 하루를 꿈꾸지만, ‘청소 중’ 팻말은 역시나 무시되고 나는 또 바깥을 나와야 한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며 웃는 히라야마처럼, 산책에 산책을 거듭하며 끝내 개념을 알아내는 신지처럼, 그런 신지를 바라보며 사랑의 의미를 더 크게 정의하는 나루미처럼, 침입과 상실을 나만의 단단한 경험이 되도록 다듬어 줄 필요도 있겠다. 영화의 영어 제목(Before we vanish)처럼,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그렇게 삶의 조각들을 어루만지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신지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씩 기억이 스며들었어. 처음엔 그냥 정보였던 것들을, 내 경험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어.”라고.
#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원작소설을 읽고 매료되어 제작된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소설은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있다. 일상의 담담한 어투가 매력적이었던 소설이, 영화화 되면서 감독의 판타지성이 물씬 묻어났던 것처럼, 초대 원안인 희곡의 분위기도 소설과 다를지 싶다. 하나의 개념이지만 매체에 따라 작가에 따라 변주되는 이야기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일관되게 유지되기에, 각자의 장면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누군가 언젠간 이 희곡을 들여와 무대에 올려주면 꼭 보러가야지. 물론 그 작품 역시 연출자의 시각으로 주제가 조각되겠지만, 그거역시 그대로 기대가 된다. 구동존이는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