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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를 담아 당신에게] 약자덕에 버티는 사람이야말로

by 오달

1920년대 영국의 작은 마을 리틀햄튼. 단정한 공기를 자랑하는 동네에, 어느 날부터 불온한 기운이 찾아온다. 언제나 고결함을 추구하는 이디스의 집으로 음탕하고 조롱 섞인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한 것. 가부장적이며 엄격한 이디스의 아빠는, 거친 언행의 이웃 로즈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혐오 가득한 추측에 내심 주저했던 이디스. 그런데 세간이 그녀를 희생의 아이콘이라 치켜세우자, 기분이 조금씩 달라진다. 나, 아빠 밑에서 꼼짝 못 하는 노처녀가 아닐지도?


한편, 자유분방한 성격의 로즈는 억울하다. 익명에 숨을 바엔 대놓고 욕할 사람이라 호소하지만, 그녀의 평판은 스스로 변호할 수단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답답하기는 경찰관 모스도 마찬가지. 유일하게 사건의 허점을 발견했어도, 수사에 배제된 여자 경찰일 뿐이다. 그 사이, 마을 전체로 퍼지는 욕설 편지.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덕일까. 세 사람 사이로 활자 테러 너머의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희다움을 강요한, 시대의 X가 버젓이 담겨있는 것을.



# 원래 세상은 대혐오시대

새해가 됐을 땐, ‘구정이 진짜 설이니까’라는 말로 미뤄두곤 한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아직은 겨울이니까’라며 안심시키곤 한다. 소중한 듯 하찮은 올해의 다짐.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연초에 가입한 커뮤니티 앱을 켜본다. 작심삼일 동지들을 기대했건만, 화면 가득 미라클 모닝이 나를 반긴다. 성실한 사람들 참 많구나. 박수를 보내려는 찰나, 문득 해외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농담이 떠오른다.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단지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그래. 한껏 잠들고 에너지 충전해서 하루를 준비할 따름인데, 대단한 프로기상러들 납셨네. 각자의 시차가 있는 건데, 세상은 왜 날 밝을 때 일하고 어두우면 잠들라는 거야. 라는 생각까지 닿는 순간 멈칫한다. 나야말로 아무리 바빠도 매일 인증하는 게 있구나. 누군가를 향한 1일 1 비난. 이처럼 자랑스럽지 않은 성실함이 또 있으려나.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조롱 정도는 무해 하다고 주장해 본다. 그런데 이런 찝찝한 자성이 무색하게도, 매일 귓가엔 된소리가 들린다. 지역이, 성별이, 소수의 가치관이 대관절 무슨 상관이길래.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흠집이라며 거친 반응이 날아든다. 이른바 대혐오시대의 창궐. 쌍시옷이 여기저기 풍년인 이유는 무엇일까. 관념이 개인화되며 수많은 분야에 개인 취향이 나타나는 바람에, 대립각을 세울 일이 늘어났기 때문일까.


이에 영화 <X를 담아, 당신에게>는 혐오의 시대가 걱정인 우리에게, 흘러가듯 옛이야기를 전해준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된 몸가짐 매뉴얼. 세상의 호불호는 정해져 있으니 따라만 오라던 우월적 메시지. 차별이 무엇인지도 모르도록 눈을 가렸던, 그 시절 신앙의 허구를 짚어낸다. ‘나 때’를 버텨낸 시대를 칭송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달라진 여건에도 우리 삶을 헤집는 여전함을 상기시킨다. 같은 경험으로 방향을 함께 찾아보자는 듯이.



# 다들 소란 피우며 사는데

20세기 초 여성참정권의 역사가 무르익는 시기가 배경이라 이야기의 방향을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영화 <X를 담아, 당신에게>를 연출한 테아 샤록 감독은, 이 영화를 단순히 정치적 작품으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상처 주고 싶다는 욕구를 느낍니다. 마치 그런 욕구가 원래 있었던 것처럼요. 제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바로 그 욕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어떤 이유로 그 사람 안에서 그런 충동이 표출되는지입니다.”


영화 중반, 이디스의 집을 방문한 모스. 이디스의 아빠는 ‘돼지가 하늘을 날 시대’라며 모스의 직업과 시청 앞 가두시위를 조롱한다. 앞뒤 맥락 없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폭언을 쏟아내는 아빠의 얼굴은 기괴하다. 집으로 날아드는 종이쪽지엔 분노하면서도, 본인의 상스러움엔 당연한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시나리오를 받은 테아 샤록 감독은 여기에 주목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에 더욱 궁금해진, 다름 아닌 혐오의 기원.


당면한 과제에 즉각적으로 부딪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그녀는 그 대신 사유하는 사람으로서 현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살펴야 할지 고민한다. 그렇게 영화는 감독의 탐구를 따라, 비장한 저항 대신 욕설 편지 사건을 대하는 세 여성의 행보에 집중한다. 공격의 의도는 결괏값에서 찾을 수 있으니까.



우악스럽고 자유분방한 아일랜드 이민자 로즈. 정숙하고 얌전함을 강요하던 가이드라인은 그녀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호전적인 행동에 걸걸한 입담은 둘째치고, 집 청소와 화장실 매너는 안중에도 없다. 그녀야말로 엄숙주의를 부술 유일한 히어로처럼 보인다. 한데 언제나 당당했던 그녀는, 증거불충분이 자신을 지켜주지 않자 매서운 눈빛을 거둔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보석 석방된 후엔, 방치했던 마룻바닥을 닦아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그냥 청소하는 거야, 좋은 엄마들처럼(making nice house like nice mothers do)”


‘넌 원래 좋은 엄마’라 다독이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 다시 느낀다. 시대가 정해준 ‘nice’의 기준을. 싱글맘 이민자로선 결코 닿을 수 없는 단어임을. 그래서 그토록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정신줄 놓고 맨발로 뛰어다닐 정도는 되어야 불안함을 감출 수 있으니까. 라인을 긋는 데 필요했던 맛있는 먹잇감이었던 그녀. 사회적 편견은 그녀가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시대는 로즈를 그렇게 조종한다.



저급한 욕설 편지를 받는 이디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정결한 여인이 되도록 꽁꽁 묶여 살았던 그녀. 오랫동안 지켜왔던 강압적인 규칙은 이디스에게 비뚤어진 허영을 심어준다. 세상의 신앙에 비춰볼 때 완성된 인간에 가까운 건 본인이라는 잘난 척. 물론 비교 대상은 동년배의 여성들이다. 그리고 괜한 우월감은 이디스의 기사가 신문에 나면서 절정을 이룬다.


“기이한 편지 사건의 피해자 스완양이, 본인의 신앙과 관용에 관해 품위 있게 말하다”


기묘하다. 내용을 보지 않아도 어떤 문장들이 시대정신을 강화할지 읽힌다. 손가락질의 대상을 정해서 낙인을 찍고, 희생과 관용의 성녀가 되도록 독려하는 가스라이팅. 하위리그를 만들어 싸움을 붙이는 얄팍하면서도 간사한 속셈이다. 교회에서 용서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하게 됐다고 자랑하는 이디스. 자신의 족쇄를 자랑하는 죄수의 모습이 있다면 이런 얼굴일까. 창살 바깥의 세상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드는 무의식의 교육. 시대는 이디스를 그렇게 가둬놓는다.



특정 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스의 모습에서 억압의 목적은 더욱 분명해진다. 자신을 소개할 때 '여성'경찰임을 꼭 붙이는 모스. "수갑 지급은 서장의 재량이라지만, 당신 상관이 그 재량을 발휘했냐"는 로즈의 비아냥에 멈칫한 걸 보면, 차별을 느끼지 못하는건 아니리라. 하지만 때어낼 자신이 없었겠지. 엇나감을 용납하지 않는 우열의 시스템은 삶의 곳곳에 화석처럼 굳어있기에.


영화 <X를 담아, 당신에게>는 로즈와 이디스라는 끝단의 두 캐릭터와 그 사이를 오가는 모스를 통해, 비상식의 프레임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펼쳐놓는다. 동등하지 않다는 생각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도전의 싹을 자르려는 목적. 이제 궁금한 건 하나다. 도대체 왜. 어째서 이들은 공고한 신앙체계를 유지하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걸까. 분명 그들이 이렇게 명료하게 선악을 나눠놓은 저 너머의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지.



# 혐오는 공포를 먹고 자라니까

이디스의 기사가 대서특필된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의 고결한 면모를 찬양하는 기사들에 본인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이디스. 그 모습을 본 이디스의 아빠는 분노를 터뜨린다. “이 집은 내가 대장이고, 너는 귀여운 이디일 뿐”이라고.


비슷한 급발진은 경찰서에서도 나타난다. 편견을 증거로 추가 수사엔 관심 없는 경찰서장. 그 사이 모스는 진범의 단서를 발견해 제출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노력은 서장의 심기를 건드린다. 주술사를 활용하자는 모스의 경찰동기보다 더 지적받다니, 황당 그자체. 더욱이 “증거가 되지 않을뿐더러, 네가 제출하면 의미가 없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그들의 표정엔 온통 핏줄이 한가득이다. 하지만 고함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떠 보자. 감출 수 없는 평생의 필체마냥, 본체의 진짜 얼굴이 보인다. 너와 나의 격차가 지워질까 여러 번이고 죽죽 그어대는 구분 선. 쌓아 올린 위치가 혹여나 위협받을까 으르렁대는 몸부림. 숨기려면 그렇게 윽박질러야 했겠지 다름아닌, 바로 공포심을.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공포는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가장 쉽게 사용되는 도구로 혐오를 꼽는다. 우습지만 정말 그래. 편 가르기가 용이하거든. 나 혼자 욕하면 이상하거든. 가장 허접하고 초라한 자기 보호. 혐오의 본모습은 여기에 있었다.


공포가 없으면 흠집을 낼 일도 없다. 술집에서 로즈와 함께 신나게 술을 마시는 동네 아저씨들은 그녀를 배척하지 않는다. “너도 술 먹고 욕도 하는데 왜 로즈만 문제냐”는 모스의 반문에 경찰 동기는 눈만 껌뻑인다. 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화낼 일이 없다. 우리는 우월함이 구분된 사이가 아니니까. 삶에서 매기는 정답 싸움은 순위를 가르는 점수제가 아니니까. 네가 옳다고 내것이 빼앗기는게 아니니까.


그러나 평화로운 단순한 진리에 고개를 끄덕여도, 눈을 뜨면 모든게 리셋. 오늘의 비난 챌린지에 뛰어든다. 뭔가 불편해도, 정숙해야하고, 엄마다워야 하고, 호칭에 따라야 하는 반사작용처럼. 호불호가 어우러지면 안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X를 위탁받아 혐오의 하청업자의 모습을 하고만다.


이에 영화 <X를 담아, 당신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임에 주목한다. “호칭이 너무 기니 그냥 모스 경찰이라 부르겠다”는 로즈의 투덜거림에 반박하려던 모스. 하지만 이어진 로즈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인다. “여자인 거 누가 몰라?”


세상이 선을 긋든 누군가 X표를 던지든, 내가 나인거 내가 알고 네가 알고 모두가 아는 사실. 모스의 각성이 여기서부터 시작된건 단순한 호칭정리 때문만은 아닐 터다. 사건이 마무리되며 각자의 위치를 찾는 세사람의 모습도 같은 맥락이리라. 없던 타이틀을 새로 얻은 게 아니다. 틀렸다고 세뇌하던 장기 투서 때문에 몰랐을 뿐. 아무 걱정말고, 편지를 찢어, 거울만 보면 될 일이었다. 로즈는 원래 엄마였고, 모스는 원래 경찰이었고, 이디스는 원래부터 자유인이었으니까. 누가 뭐래도 말야.


내 우편함에도 X가 담긴 편지가 잔뜩일 텐데. 퇴근하면 바로 휴지통에 버려야겠어.

그리고 내가 너에게 보내려던 편지지도 까먹지 말고 함께.










# 혐오를 조장하는 기득권과 그 시대정신에 눈이 가려졌었던 인물들에 집중했지만,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사실 코미디. 커다란 눈으로 시대와 기싸움을 하는 모스의 새초롬함. 걸걸하지만 밉지않은 로즈의 왈가닥력. 무엇보다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소를 못감추는 이디스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음. 올리비아 콜먼 배우가 연기 잘하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영화에서 더욱 빠져버렸지 뭠니까.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새라 베럴리스도 자신의 음악세계와 정체성을 비집고 들어오는 시장의 입김을 향해 강력하고 통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네가 반대하든 말든 누가 신경 써?
Who cares if you disagree?


넌 내가 아니잖아!
You are not me


누가 당신을 왕으로 만들었나?
Who made you king of anything?


내게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말야
So you dare tell me who to be?


누가 죽어서 널 나의 왕으로 만들었냐고!
Who died and made you king of anything?


분노 가득한 대사지만 밝고 명랑한 음악이 왠지 더 핵심을 담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나를 짓눌러도, 내 입에서 상스런 욕이 나와도, 내 감정은 전혀 타격이 없다는 기존쎄마인드. 열받는다고 씩씩대면 그거마저도 감정낭비지. 세상에 웃으면서 욕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영화 <X를 담아, 당신에게>에서 마지막 한방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시원하게 웃음짓는 주인공들처럼.


https://youtu.be/eR7-AUmiN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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