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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 Sep 26. 2023

[홀리의 책] 들판이 집이라는 순수한 소녀는 왜

소설 <비둘기 속의 고양이>, 그리고 영화 <나이스 가이즈>



"Had Mademoiselle Blanche been England before? What part of France did she come from? Mademoiselle Blanche replied politely but with reserve"

"블랑쉬 부인, 전에 영국 가본 적 있나요? 프랑스 어디 출신이세요? 블랑쉬 부인은 겸손하게 대답하면서도 신중했다."



한 소녀가 한밤중에 들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유리 멘탈에 허술한 탐정인 아빠 마치(라이언 고슬링)와 파이터 출신의 청부 해결사 힐리 아저씨(러셀 크로우) 사이에서 똑 부러지는 순수함으로 사건을 돕는 중학생 홀리. 집을 날려버린 아빠 덕분에, 들판을 투명한 집으로 상상하며 독서 중이다.


1977년 로스앤젤레스, 현재 이들이 쫓고 있는 사건은 아멜리아 실종사건이다. 사건을 파면 팔 수록 이면에 숨은 거대한 세력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설정한 공간에서 책을 읽는 홀리. 그래도 밤이라 무서워서 그랬을까, 책에 집중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홀리는 글귀를 소리 내어 읽는다.


영화에서 캐릭터가 책을 읽는 장면은 여럿 봤지만, 이렇게 특정 구간을 소리 내어 있는 일은 흔치 않다. 감독은 왜 홀리에게 이 책의 이 구절을 읽게 한 걸까. 허나 화면에는 책의 표지가 잡히지 않아서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필요한 건 역시, G 선생님. 구글에 접속해 홀리가 읽은 문장을 영어로 검색한다.



역시 내가 궁금한 건 다른 사람이 이미


영화가 나왔을 2016년에 이미 누군가는 질문을 했다. 영화 <나이스 가이즈>에서 홀리가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그래 표지를 안 보여주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니까. 답변에 따르면, 홀리가 읽고 있던 책은 1959년 발간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Cat Among the Pigeons>, 한국어 제목으론 <비둘기 속의 고양이>였다.


곧바로 도서관에 있는 걸 확인하고 누가 채갈세라 도서관을 방문해 대여해 온다. B6 크기에 300페이지가 안 되는 길지 않은 소설. 책을 열어보니 그만큼 또 글자가 작다. 하지만 추리물에 환장하는 코난 키즈로서, 이 바닥 레전드 애거서 선생님 작품을 책의 피지컬로 대할 순 없지. 경건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열어본다.



폰트부터 강렬해버림


총 25 챕터로 구성된 소설은, 영국의 유명 사립 여자학교인 매도뱅크 학교로 독자를 데려간다. 한껏 신난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학부모들은 선생님들과 하하 호호 인사를 나누는 새 학기. 명성에 걸맞게 새로 구축한 실내경기장은 이들을 바라보며 한편에 우뚝 서있다. 그러나 이런 활기도 잠시, 실내경기장에서 둔기에 맞은 시체가 발견되며 얼어붙어버린 학교. 평판을 유지해야 하는 학교는 경찰에게 조용한 수사를 요청하지만, 교정의 분위기는 점점 미스터리로 빠져들고 사건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추리소설은 대개 탐정의 심문과 탐문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비둘기 속의 고양이>의 진행 방식은 결이 살짝 다르다. 물론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탐정 캐릭터인 포와로 탐정이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 나타나 사건의 문을 닫아주는 역할이라, 왠지 카메오 같기도 하단 말이지. 스토리는 주로 학교 안의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사건을 담당한 경찰이 이끌어가는데, 추리 사기캐의 부재가 오히려 이 책의 묘미였을까. 탐정 뒤에서 편히 지켜보게 하는 것 대신, 독자들을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눈치싸움의 한가운데에 서있게 만든다.



물러날 때를 안다는 것, 이것은 인생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 중 하니다. 자신의 힘이 쇠약해지기 시작해 확실한 파악이 어려워지기 전에, 그리고 조금이라도 진부해지고 노력의 한계에 부딪치는 걸 느끼기 전에 물러나는 것이다.
소설 <비둘기 속의 고양이> p82



한편 소설은 일부러 탐정의 시각에서 거리를 두어, 사건의 무대가 된 학교를 조망한다. 후발주자였지만 교장을 비롯한 초기 멤버들의 열정으로 영국 최고의 엘리트 학교로 성장한 매도뱅크 학교. 이곳엔 높은 수준의 교육과 관계를 위한 욕망이, 더 나은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세대교체의 고민이, 기숙학교라면 피할 수 없는 작은 사회의 날카로움이 존재한다. 밀실 아닌 밀실이라 속내가 보이기도 감춰지기도 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를 형체 없이 떠다니는 각자의 가치관들. 애거서 크리스티는 살인사건 덕에 드러난 서로의 민낯을 비추며 손에 쥔 걸 흘려보내야 하는 인생과, 그리고 자연스러운 바톤터치 방법에 대해 묻는다.



앵거리 라이스와 감독 셰인 블랙 (사진 출처: filmink)


소설의 작품성은 알겠다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영화 <나이스 가이즈> 속 홀리는 들판에서 많고 많은 책 중에 왜 이 책을 읽은 것일까.


가장 쉽게 떠올릴 이유라면, 캐릭터의 개연성을 위한 소품일 테다. 탐정의 딸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사건에 호기심을 갖는 본격적인 이유가 되긴 부족하다. 그래서 평소에도 추리소설을 읽는 소녀로 설정을 했겠지. 미스터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눈치도 빠른 캐릭터 빌드업을 위해서.


반대로 소설 <비둘기 속의 고양이> 속 등장인물을 통해 추측을 해본다. 그중 매도뱅크 학교 학생 중 하나인 '줄리아'가 눈에 들어온다. 줄리아는 미스터리한 사건에 호기심을 갖고, 어른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으며, 자칫 위험한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성향의 소유자다. 그 모습이 마치 나사 빠진 어른들 사이에서 야무진 한마디를 날리는 홀리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쾌활하고 똑 부러진 성격도 비슷하기에, 줄리아의 얼굴이 홀리처럼 생겼을 거란 상상까지 했음. 감독은 홀리의 캐릭터를 만들 때 줄리아를 참고한 게 분명해.(라는 내 생각) 그래서 시나리오 상 추리소설은 읽혀야 하는데, 홀리의 캐릭터 구축에 영감을 준 소설 <비둘기 속의 고양이>를 손에 들렸을지도(라는 뇌절)



**여기서부터 영화 <나이스 가이즈>의 스포일러 주의**


사실 이보다도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자면, 소설 <비둘기 속의 고양이>의 제목이지 않을까. 제목 자체만 들으면 무슨 의미인지 한 번에 오진 않지만, 소설에서 그 뜻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비둘기 속의 고양이, 뭐 그런 느낌이에요. 우리들이, 즉 이곳 사람들 모두가 비둘기이고 그 무리들 속에 고양이가 끼어들어와 있는 듯한, 그렇지만 우리들 눈에는 그 고양이가 보이질 않아요.
소설 <비둘기 속의 고양이> p123



소설에는 감수성과 표현력이 평소에도 뛰어난 선생님 리치가 등장한다. 사건 청취를 하는 경찰에게 '비둘기 속의 고양이'라는 말을 던지며, 의미심장하게 주변 모두를 의심하게 한다. 매카시즘스러운 이 말은 결국 쉽게 말해, '우리들 가운데 스파이가 있어'라는 말. 영화 <나이스 가이즈>의 범인 역시 (영화 중간에 누군지 거의 알아챌 정도이긴 해서 놀랄 건 아니었지만) '비둘기 속의 고양이'스럽게 나타난다. 그래서 홀리가 읽는 '비둘기 속의 고양이'는 감독이 독자들에게 흑막의 힌트를 알려주는 나름의 이스터에그였을지도 몰라. 근데 책 표지도 안 보여주고 아무 상관없는 라인만 읽게 하면 어떻게 알아채라는 겨.


스포일러 끝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열심히 찾았던 부분은, 영화 속에서 홀리가 소리 내 읽었던 그 부분이다. 같은 문장이지만 책은 어떻게 번역을 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 책을 고른 첫 번째 이유이기도 했기에, 언제 그 장면이 나오나 눈에 불을 켜고 읽어댔다. 그리고 챕터 6. 문제의 그 문장이 등장한다.



잡았다 요놈




"replied politely but with reserve"

겸손하게 대답하면서도 신중했다.(넷플릭스 자막)

정중하게 대답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삼가는 눈치였다.(소설 번역)


뭔가 비슷한 뉘앙스이면서도, 살짝 느낌이 다르다. 넷플릭스 버전의 블랑쉬 부인은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인다면, 소설 버전의 블랑쉬 부인은 간을 보며 분위기를 살피는 듯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뭐 내 느낌이지만. 사소한 단어일지 몰라도 어떤 어휘를 고르느냐에 따라서 등장인물을 바라보게 하는 경로를 어느 정도는 만들 수 있구나. 재밌는데 무서운 일이야.


아무튼 홀리 덕분에 추리소설계의 거성 애거서 크리스티 선생님의 작품을 하나 또 보게 됐다. 시나리오 개연성을 위해, 캐릭터 구축에 영감을 줬기 때문에, 그리고 영화의 반전에 대한 힌트로 등장했(다고 내가 혼자 생각하)던 책 <비둘기 속의 고양이>  '추천해 줘서 고마워 홀리야'라며 책을 덮으려는데 이걸 어쩌나. 소설 말미, 줄리아 역시 홀리처럼 책을 들적들적 한단 말이지. 사건이 모두 해결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줄리아는 학교 작문 숙제를 하는데, 그 주제가 <살인에 대한 멕베스와 멕베스 부인의 태도를 비교하시오> 라니? 소설 속 사건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주제이긴 하지만, 저기여 이러면 멕베스를 읽어야 하잖아여. 


그래 괜히 외면한 셰익스피어도 이젠 읽을 때가 됐나 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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