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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 Oct 11. 2023

[세연의 책] 생일도 잊혀야 했던 그녀는 왜

시집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가 전하는 마음



식구들이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저녁. 엄마 세연(염정아)은 책장 서랍 가장 높은 곳에 넣어놨던 상자를 꺼낸다. 행여나 누가 훔쳐갈까 숨겨놓은 패물상자려나 싶었는데, 낡은 상자 안엔 잡동사니들과 함께 작은 책이 한 권 들어있다. 그리고 색 바랜 책장 사이로, 그만큼이나 오래된 사진과 나뭇잎 책갈피. 자신의 이름도 생일도 희미해진 그녀는, 눈부셨던 그 시절 지난날을 떠올리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시작한다. 


결혼과 육아에 소유의 욕심을 하나둘 놓아야 했지만 끝까지 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했던 책. 그리고 소중한 기억을 숨겨놓을 비밀스러운 장소로서의 책. 아마도 단순한 기념품을 넘어 세연의 인생을 지탱해 온 한 축이었을까. 저 페이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고이 추억을 끼워놓았을까. 눈도 나쁜 내가 화면을 멈추고 픽셀이 뚫어져라 글씨를 읽어본다. 도대체 뭐라고 써있는거야. 세연의 마음을 읽어내고자 모니터와의 눈싸움을 여러 번 벌인 끝에 왼쪽 페이지에서 단서를 얻는다.



태초부터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가며 숭배해 왔다



인간이 살면서 은연중에 붙잡는 신앙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려나. 마치 세연이 삶에 지쳐 자기를 잃어갈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떠올리는 과거의 한 자락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정도 문장이면 도서검색으로 나올 법도 한데, 구글 선생님은 종교철학과 관련한 논문자료만 우수수 털어놓는다. 이젠 저 사진 뒤에 가려진 글귀가 어떤 책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렸다. 다행히 세연은 페이지 위의 사진을 꺼내 들었고 그 사이로 숨어있던 오른쪽 구절이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그대 어깨에 놓인
인생의 손이 무겁고
밤이 무미(無味)할 때



뒷 내용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단 세 문장으로 이미 위로받을 준비를 하게 하는 묘한 글귀. 촉촉한 마음으로 검색창에 따라 적어보니, 짧지만 사랑이 깊이 필요한 이유를 꾹꾹 새겨낸 시 한 편이 나를 반긴다. 레바논 출신 이민자면서 독창적인 예술가였던 칼릴 지브란과, 그의 천재성을 사랑해 평생을 후원했던 예술학교 교장 메리 헤스켈의 편지를 엮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의 한 페이지. 시 한 편으로도 묘한 울림이 있는데 책 한 권으로 모아놓았다니, 이거 안 찾아볼 수가 없잖아.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는 걸 확인한 뒤, 영화에 다시 빠져든다. 작은 단서지만 추적해 낸 나 자신 기특해. 검색 지능의 승리다.


라고 칭찬을 하는데, 영화 후반부에 책의 제목이 정확히 나오는 컷이 등장한다. 엥? 이렇게 정확히 제목을 보여준다구? 책의 내용이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이는 컷에서 멈추려고 애썼던 뻘짓이 떠오른다. 리모콘 반응속도가 느려서 담답해하던 조금 전의 나. 이런 친절함이 있는 줄도 모르고 고생을 했네. 상대방이 내게 뭔가 숨긴다는 판단은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는 것인가. 이젠 궁금한 건 영화 다 볼 때까지 좀 참아보자.



이렇게 원샷을 주다니


아무튼 화면에 책 제목을 제대로 비춰준다는 건 감독이 얘기하고 싶은 포인트가 이 책에 분명 있는 것일 터. 반드시 찾아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영화를 다 본 후 도서관으로 재빨리 달려간다. 영화에 등장한 책과 같은 버전으로 보고 싶었는데, 책장엔 진선books에서 출판한 하얀 커버뿐이었다. 온라인으로 찾아봐도 영화에서 사용한 책은 찾을 수 없음. 심지어 책 표지에 적힌 '주몽출판사'는 존재하지 않는 출판사인 듯. 검색왕인 내가 못 찾을 리 없어. 아마 소품팀에서 영화의 톤과 맞게 새로 디자인한 책 일거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침대 옆에 앉아 한 커플의 이야기를 조용히 집중해 본다. 칼릴 지브란보다 열 살 연상인 메리 헤스켈. 혹자는 둘 사이에 로맨스가 있던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지만, 그녀는 그런 단순한 감정을 넘어 칼릴 지브란의 무한한 세계를 알아본 정신적 지지자였다"나는 메리 하스켈을 통해 예술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라며 유학당시 친구에게 편지를 전했던 지브란. 정리되지 않은 청년의 에너지가 두터운 철학으로 승화되기까지 헤스켈의 애정이 자양분이 됐던 게 분명하다. 예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물론, 그가 품고 있는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그녀둘 사이에 이성적 매력이 한 번도 스치지 않았겠냐만은,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깊은 마음으로 영원한 예술적 파트너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와 같이 영혼의 단짝이었던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인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책 두께만 보면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슬쩍 읽어 넘길 수 없는 삶의 통찰이 가득했다. 겉으로는 서로를 향한 깊은 표현들이면서 한편으론 편지를 읽는 내 마음을 비춰주기도 한다. 두 사람은 알았을까. 백여 년 전 꾹꾹 눌러쓴 고백이 알지도 못하는 저 멀리 한국땅의 아무개가 가슴 찡하게 읽고 앉아있으리라고.



주고 받는 맛이 아주 감칠났겠어


담백하다. 하지만 묘하게 진한 여운이 남는다. 이것이 시가 지닌 매력이겠지. 간결하면서 행간의 호흡을 조절해, 읽는 이로 하여금 단어의 힘을 더욱 느끼게 하는 고도의 스킬. 어영부영 문장을 때려 박기 급급한 나로선 시인은 언제나 리스펙이야. 그런데 시집(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지?)은 여기에 한 가지 읽을거리를 던져준다. 편지글마다 칼릴 지브란이 그동안 집필한 다른 저서 속 문장을 발췌해 편지의 메시지를 한번 곱씹어 있도록 엮은 것. 지브란 덕후들이 집단지성으로 재구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를 이해하게 하는 해설자 역할을 한다. 편지는 메리 헤스켈에게 당시의 마음을 떠오르는 대로 전한 것일 텐데, 그의 작품 속에도 닮은 문장들이 존재했다니 신비롭구먼 이거. 아마도 단순히 피어났다 사라지는 허영의 철학이 아니라, 되새기며 공고히 쌓은 그만의 태도가 묻어난 결과일 테지. 얼레벌레 글을 싸지르는 나를 돌아본다. 그곳엔 일관성이 얼마나 있는지. 어쩌면 단순히 있어 보이려는 문장의 나열은 아니었는지.


페이지마다 전해지는 감동과 반성은 적당히 하고, 이 책을 빌려온 목적에 집중해야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세연이 추억을 숨겨놓았던 페이지를 찾아보자. 그리고 책 중반을 넘어갈 즈음 세연이 고이 접어놓았던 구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
어깨에 놓인
인생의 손이 무겁고
밤이 무미(無味)할 때

바로
사랑과 믿음을 위한
시간입니다

그대는 알고 계십니까?
얼마나 삶의 무게가 덜어지는지
얼마나 우리의 밤이 즐거워지는지

모든 것을 믿고

사랑할 때면


1916년 12월 19일 칼릴 지브란



자아는 잠시 거둔 채 엄마와 아내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세연. 게다가 세상에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는 두려움까지 엄습한다.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역할을 자처한 건 아니지만, 무플은 악플보다 무서운 법. 존재가 지워지는 기분은 겪어보지 않으면 누가 알까. 이런 그녀가 오랫동안 책장 꼭대기에 숨겨놓았던 주문을 꺼내든다. 찬란했던 시절을 꽂아놓은 책이니, 어떻게든 나에게 힘을 줄거란 막연한 믿음도 왠지 스친다. 풋풋함이 담긴 사진에 슬며시 피어나는 세연의 미소. 지브란은 그 훈훈함을 알아챘는지 아무런 생기를 느낄 수 없는 밤일지라도 모든 것을 믿고 사랑한다면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라 다독인다.


허나 어떻게 보면 인생의 수세에 몰린 사람에게 사랑이 만병통치약이라며 맥없는 응원만 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현실은 여전히 무미(無味)하고 인생의 손이 무거운데 무슨 사랑이 나를 구해준단 말인가. 이미 감정소모에 탈탈 털려 믿음을 던질 기운이나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세연의 회상 속에서 옛사랑 정우와 함께 이 책을 들고 뮤지컬 댄스를 쭉쭉 내민 걸 떠올려보자. 관객 눈앞에 대놓고 들이미는 걸 보니, 왠지 수록된 편지 한 통을 넘어 오랜 기간 엮인 책 전체의 관점으로 문장을 이해하라는 힌트 같다. 시각을 넓히니 편지 앞 뒤로 켜켜이 쌓인 화자들의 관계가 보인다. 단순히 믿음과 사랑으로 현재를 극복하라는 하나마나한 응원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애정으로 내 인생을 극복한 만큼 당신이 힘들 때 곁에 있는 나를 기억해 달라는 메시지가 보인다. 마치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옛사랑이 즐겁게 살고 있길 바라는 고등학생 소녀의 마음처럼, 혹은 내가 떠나도 이 세상에서 힘껏 살아내길 바라는 아내와 엄마의 마음처럼.


이 책 좀 보라고 춤까지 춰줌


감독이 세연의 마음에 불꽃을 터뜨리는 부싯돌로 책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를 고른 이유, 그리고 굳이 그 페이지에 추억의 사진을 꽂아놓은 이유, 아마도 '사랑으로 오늘을 극복하자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전하자' 정도로 정리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편지만이 먼 거리의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였던 것과 달리, 지금은 텍스트가 전파를 타고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문자도 인플레이션이 있는 걸까. 쉽고 간편해 말들이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만큼 문장 하나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감정이 반드시 단단하고 묵직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흩날리는 단어의 홍수 속에 오늘을 이겨낼 응원이 몇 자 안 된다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다. 꼴통 같아 보였던 남편 진봉(류승룡)의 진짜 마음을 들려주지 않으면 세연이 전혀 알 수 없듯, 가끔은 꾹꾹 눌러쓴 편지 한 통이 필요한 시대. 인생이 아름다운 순간은 그 진심이 맞닿을 때 비로소 열리는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책의 제목이 묘하게 더 울린다. 그렇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다. 지브란의 말처럼 '그 뒤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말이다. 그러니 이따가 저녁에 꼭 부모님께 카톡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아마 삼일 뒤에 엄마한테 먼저 전화 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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