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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 Feb 21. 2024

[섀도우 댄서] 누구도 못건들 우선순위가 있다는 건

1993년 런던의 지하철, 어딘지 모르게 수상한 여자가 계단 위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황급히 도망친다. 그녀의 이름은 콜레트. 어린 시절부터 북아일랜드 분쟁을 온몸으로 겪었으며 현재 영국 연합주의에 강경하게 맞서는 무장단체 IRA의 일원이다. 지하철 테러작전의 실패로 영국정보부 MI5에 잡혀 온 그녀. 정보부 요원 맥은 하나뿐인 아들 마크의 신변을 언급하며 그녀에게 IRA의 내부정보를 빼돌리라고 강요한다. 그녀의 신념은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야 하는 엄마의 마음과 부딪치고, 결국 괴로운 이중 스파이가 되는 콜레트. 믿을 수 없는 영국정보부의 속내와 피할 길 없는 조직 내부의 감시 속에서, 그녀는 조용한 그림자로서 악착같이 버티고자 한다. 이보다 중요한 임무는 그 이상 없는 것처럼.



# 계획을 부수는 교란종

가끔, 해야 할 일이 잔뜩이라 삶의 정리가 어려운 순간이 있다. 이럴 때마다 금방 머릿속엔 클래식한 조언 하나가 떠오른다. 커다란 돌멩이와 작은 조약돌들, 그리고 모래를 수조에 가득히 채우는 방법은 무엇인지 묻는 퀴즈다. 동기부여 강연 콘텐츠에서 무수히 들었던 만큼, 해답도 금세 튀어나온다. 단일 크기가 큰 순서대로 수조에 채워 넣으면, 틈 사이로 작은 물체들을 흘려보낼 수 있으므로 빠뜨림 없이 정리할 수 있다는 그런 이론이다.


큰일부터 차근차근 처리하라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튼 비유를 이해하며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돈, 공부, 아니면 휴식이나 꿈일 수도. 물론 보편적 우선순위는 대개 비슷할 테지만, 가장 먼저 주워야 할 돌멩이의 순서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진다.


헌데 정말로 다급하거나 오랜 시간 염원해 온 일이 있다 하더라도, 수조를 채울 계획 따윈 잊게 만드는 끝판왕 선택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족을 건드리는 일, 특히 자식과 연관이 있다면 이는 어떤 조건도 무력화할 수 있는 필살기가 된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학대범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상식적 인간을 대상으로만 이야기하자)  마치 노래방의 우선 예약 버튼처럼, 자녀의 신변 앞에선 명함 하나 못 내밀고 올스톱이 되는 현실. 세상에 이런 생태계 파괴범이 또 있을까.


영화 <섀도우 댄서>의 콜레트도 두 갈래 길에 놓인다. 조직과 아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그녀에게 정치적 신념은 소용돌이와 같았던 피의 역사 그 자체다. 어린 시절 분쟁의 총격으로 동생을 잃었던 순간, 혹은 분쟁의 중심인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순간, 그녀가 걸어갈 인생의 시나리오는 이미 정해진 셈이다. IRA 일원으로서의 길은 숙명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스파이가 된다는 건, 그녀 스스로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으로 어떠한 회유에도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결국 MI5 요원 맥이 던진 카드에 무릎을 꿇고 만다. ‘당신은 이미 잡혔고, 끝났다. 아들도 마찬가지다.’ 



# 누가 가르쳐준 미션도 아닌데

자녀의 상실. 이는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장 최악의 비극인 것일까.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하나 보다. ‘남편을 잃은 부인을 과부, 부인을 잃은 남편을 홀아비, 부모를 잃은 아이를 고아라고 부르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말이 없다.’ 표현 불가능의 슬픔이라, 그 상황이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분명한 단어를 만들지 않았던 인류애적 마음이려나.


이 참혹함은 ‘단장지애(斷腸之哀)’, 즉 새끼를 잃고 고통스럽게 죽은 원숭이를 이상히 여겨 배를 갈라보았더니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는 옛이야기를 통해 겨우 가늠해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의 범죄가 자녀의 실수를 숨기기 위함이거나, 구하지 못한 슬픔으로 인한 복수심이었다면, 눈먼 행동에 동의할 순 없어도 왠지 심적으로 끄덕여지기도 한다. 경험 없는 공감은 어렵지만, 측정이 불가능한 아픔은 논리와 상관없이 동기화되니까.


영화 <섀도우 댄서>의 콜레트 눈에도 아들이라는 단 하나의 바위만 보였으리라. 마크를 앞으로 만나기 어렵게 할 뿐 해치겠다는 협박을 한 건 아니었지만, 가끔 침대에 소변을 보는 아들의 버릇까지 파악한 MI5가 두렵지 않을 수 없었겠지. 서슬 퍼런 긴장감 속에 엄마라는 보호막을 벗겨내는 건, 연약한 아이를 사지로 모는 형국일 테니. 하지만 흔히 말하는 ‘내 자식만 자식’인 내로남불격 태도는 이해해주기 어려운 법. 무장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누군가를 해쳤을지 모를 그녀의 전적을 떠올려보면, 모성애를 향한 무조건적 응원은 접어두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영화 <섀도우 댄서>는 폭력적 전통으로 오랜 세월 빚어진 그녀에게 딜레마를 심어주며,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틈을 열어준다. 자신의 형제들이 벌인 테러로 사망한 반대세력의 장례식에 방문해 애도하고, 본인이 담당했던 지하철 테러도 일부러 실패하는 콜레트. 그녀의 눈빛엔 적대감 대신 말하지 못할 침묵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작전을 통해 아무도 죽지 않게 하겠다’는 맥의 단언을 듣고 나서야 스파이 제안을 받아들였던 콜레트. 이런 태도를 미루어보면 아들의 안전이 볼모로 잡히기 전, 콜레트의 마음속엔 이미 가치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분쟁의 어귀에서 삶의 닻이 내려간 태생적 배경을 떠올리면, 한편으론 테러를 망설이는 심경의 변화가 어찌 가능할까 싶다. 허나 단서를 아무리 찾아봐도 그녀가 선로를 돌린 터닝포인트는 역시나 하나로 수렴한다. 바로 마크의 탄생.



영화 <섀도우 댄서>를 연출한 제임스 마쉬 감독은, ‘시대와 배경을 초월한 보편적인 탐구를 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기본적으로 정치영화의 틀을 하곤 있지만 주어진 상황을 배제한 가족의 현상에 더 집중했다는 감독. 영화의 원작소설을 쓰고 각본까지 맡았던 톰 브래드비 역시, ‘이 영화는 특정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닌, 속해있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며 집필 의도를 밝혔다. 두 창작자는 20세기를 관통했던 북아일랜드 분쟁을 소재 삼았지만, 처절한 역사적 사실보다 신념과 가족의 갈림길에서 한 인간이 겪는 고뇌와 선택을 엿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살얼음판을 걸어야 하는 위험에도 아들의 안전을 우선하는 콜레트를 통해, 결국은 공고한 가치관을 뛰어넘어내는 본능에 주목한다.


태어난 공간이 오롯이 정의였던 그녀는, 이처럼 인생을 뒤집는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이나 했을까. 그렇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행보에 놀란 기색조차 없다. 다른 옵션은 생각도 않는다. 아무도 가르친 적 없어도 창자가 끊어지는 상실의 고통을 느꼈던 원숭이처럼,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엄마의 몸속엔 새로운 DNA가 새겨지는가 보다. 너를 보호하지 않으면 내 자신이 찢어진다고.



# 보호의 흐름이 이어질 때

이렇게 모성애 이야기를 할 때, 혹자는 이런 비판을 하기도 한다. 탄생과 소멸은 불변의 진리인데, 측정 불가의 공포를 앞세워 ‘부모라면 응당 가져야 할 마음’을 강제하는 건 아니냐고. 영화 <섀도우 댄서>의 시나리오를 보고 ‘어머니가 되기 위해 가족, 이상, 견해, 전통을 배신하고,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는 현상이 와닿았다’는 제임스 마쉬 감독의 인터뷰에도 비슷한 맥락이 들어있다. 맞는 말이다. 이름이 사라진 어머니의 역할을 맹목적으로 숭고하게 여기는 건, 아무래도 이상적인 시대정신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또한 ‘내 귀한 자식’만을 외치는 애지중지도 본받을 만한 사랑법은 아니잖아. 그런데 참 요상하다. 부모됨의 부담감과 안하무인 애정에도 같은 빛깔이 잠시 스치거든. 너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에 영화는 한 명의 캐릭터를 더하며 인간의 신비를 이해한다. 작전에 나간 콜레트가 총격에 놀라 도망쳐왔을 때, 떨리는 손을 말없이 씻겨주는 그녀의 엄마. 콜레트는 그제야 복받쳐 눈물을 흘린다. 이는 생일선물로 자전거를 받은 마크가 들판을 달릴 때, 두려움을 감추고 환하게 응원하는 그녀의 미소로 이어진다.


앞서 언급한 감독의 인터뷰대로 처한 상황을 배제하고 인간에 집중하니 힌트가 보인다. 슬픔을 알아주고 행복을 지켜주고자 오롯이 아이를 품어준 온기는,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다음 세대를 향한 보호의 물결이 되는 것임을. 이는 어쩌면 분쟁 덩어리인 지구에서 살아남을 계획으로, 인류가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주워들은 돌멩이였음을. 이렇게 우선순위는 엄마의 마음처럼 남몰래 흘러왔다. 그리고 기다린다. 어디론가 자연스레 흘러가기를.











* 문득 예전 경연프로그램에서 ‘한 번도 그대의 쉴 곳이 아녔던 나’를 외치며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그린 노래 <Lullaby>가 떠오른다. 함께 슬퍼했던 마음을 이제야 반성한다. 어찌 감히 당신의 쉴 곳이 되려 했나.

100세 할머니도 80세 딸의 옷차림이 춥다고 여전히 걱정하고 있는데 말야.



https://youtu.be/PvPIlH-cw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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