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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Sep 04. 2019

자본주의 한국어

응 그거 아냐~



"온니 마솨지~"

"나카산? 돗담배?"


보라카이 중심가를 걷고 있으면 끊임없이 누군가가 말을 건다. 그들이 어필하고자 하는 품목들은 매우 다양하다. 마사지, 패러세일링, 세일링보트, 방수가방 등등 가지각색의 상품으로 어떻게든 손님을 끌어보려고 한다.


한적한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다고? 적어도 보라카이에서는, 특히 화이트비치 주변에서는 한적함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해변을 걷는 내내 호객꾼이 장사를 한다. 초반에는 호객 행위가 눈에 거슬리고 싫었는데 3일쯤 지나자 나도 보라카이화 된 것일까. 그냥 하나의 소음이자 풍경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무시할 수 있었다.


"나카산! 나카산!"

"돗담배! 돗담배!"


낙하산이라는 건 패러세일링을 말하는 것 같고, 돛단배는 뭐지? 고개를 들자 바다 위를 넘실 떠다니는 파란 돛이 인상적인 무동력 배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저게 돛단배구나.



생각해 보면 돛단배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소래포구나 연안부두 혹은 그 외 여러 지방의 포구들에서 본 배들은 크기가 크든 작든 다 동력이 있는 배들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저 돛단배들은 대부분 선셋 투어를 위한 무동력 배다. 오로지 사람과 파도의 힘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배. 내가 그림책에서 보던 돛단배는 뗏목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관광지의 돛단배는 좀 더 컬러풀하고 예쁘다.


낙하산, 돛단배라는 한국어가 있는데 난 여기 오기 전부터 패러세일링, 세일링보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물론 패러세일링과 낙하산은 100% 일치하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외국인이 말하는 예상치 못한 한국어는 꽤나 정감 있게 다가왔다.


"마솨지~온니 마솨지~"

"놉!(단호한 손짓)"

"아이고야"


끊임없는 호객행위를 끊임없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내가 친구들은 신기하단다. 그런데 내 귀에는 더 신기한 말이 계속 들렸다. 내가 단호한 손짓과 냉랭한 무표정으로 "놉!"을 외치며 호객꾼 들을 지나칠 때마다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저 탄식들..


"아이고야"


발음과 강약에 따라서 "아이고야"가 되기도 하고 "하이고야" 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갑게 호객행위를 끊어내자 (안 그러면 계속 따라오는 호객꾼들이 있다. 특히 남자 호객꾼들) 여자든 남자든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탄식을 내뱉는다. 저건 도대체 누가 가르쳐 준 거야?


보라카이에서 지내다 보면 별 한국어를 다 만난다. 한 번은 레스토랑 앞을 지나가는데 여자 호객꾼이 우리를 보며 엄지를 척 내밀며 말했다.


"존맛탱"


귀를 의심하며 쳐다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메뉴판을 내민다. 우리는 그곳에서 밥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같이 엄지를 척 내밀어 주었다.


화룡점정은 호핑투어를 갔을 때였다. 우리가 간 호핑투어는 굉장히 신나고 발랄하고 소위 '클럽'느낌이 나는 호핑 투어였는데 한국인 가이드가 약간 스윙스를 닮았다. 배에 탑승하는 필리핀 크루들은 필리핀 사람들 답게 춤과 음악을 좋아했는데 우리는 약 반나절 동안 배 안에서 그들과 술도 뿌리고 (마시고가 아니다) 춤도 추고 게임도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잘 놀고 마지막에 호핑 투어 홍보를 위한 단체 사진을 찍는데 필리핀 크루들 중 리더였던 M이 사진을 찍어주며 한 단어를 외쳤다. 마치 김치~하라는 듯이.


"앙 기모띠!!"

"야! 야! 하지 마!"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유명인을 닮은 한국인 가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걸 보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허이고야" 그 말을 저 필리핀 사람에게 누가 알려줬을까. 옆에서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손사래를 치는 저 남자가 유력한 용의자인 것 같은데. 세상에 보라카이에서 한국 사람들도 내뱉지 않는 말을 듣고 있다니. 재밌고 신기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보라카이에서 가장 긴장되고 보람찬 순간은 단연코 이 호객꾼들과 가격 협상을 할 때이다. 보라카이는 일반적인 필리핀 물가보다 배 이상 비싸다. 아마도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현지인 가격과 관광객 가격이 나누어진 것 같았다. 물가가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저렴하기 때문에 이왕 여행에 왔으니 너무 아끼지 말고 팍팍 쓰자는 평소의 신념대로 다녔다.


그런 나도 구두쇠가 되는 순간이 바로 호객꾼들과 협상을 할 때이다. 바다에서 패들 보트를 빌리거나 패러세일링 등 해양 액티비티를 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방법을 알아보았다. 사실 친구가 보라카이가 5번째라고 해서 이 친구에게 기대를 많이 했는데 친구야 말로 맹탕 중의 맹탕이었다. 심지어 예전에 가격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알아야 협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텐데 믿었던 아군이 무능력하니 적진에 홀로 쳐들어가는 심정이었다.


패러세일링을 하기 위해 편한 방법으로는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가는 방법이 있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업체를 이용하게 되기 때문에 꽤 신뢰도가 높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후기들을 읽어보며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다. 단점은 비싸다. 보라카이에서 현지인들과 협상을 하게 되는 가격보다 1.5~2배 정도 비싼 편이다. 이 방법이 더 비싸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현지에서 직접 가격 협상을 하다 보니 편리한 만큼 비싸다는 걸 깨달았다.


화이트비치에 즐비한 해양 액티비티 업체들 중 2~3곳만 들어가 보면 대략 가격이 나온다. 이들 역시 처음에는 비싸게 부르지만 점점 에누리를 해주는데 어느 정도 선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2~3곳 정도를 돌았는데 '어느 정도의 선'이 다 동일했다. 대부분 이 가격 이하로는 팔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것 같았다. 그럼 이 가격으로 하거나 이 가격보다 조금 더 낮으면 그래도 잘하는 거구나 라는 감이 왔다.


업체를 나와서 해변가에 즐비한 호객꾼들에게 다가갔다. 난 1명에게 다가갔는데 갑자기 해변에 널브러져 있던 다른 호객꾼 4~5명이 날 둘러쌌다. 각자 프리랜서인 줄 알았더니 뭔가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일까. 30살을 넘기고 나서부터 난 살짝 얼굴이 두꺼워졌기 때문에 전혀 개이치 않고 딜을 시작했다.


단호하고 명료한 나의 어법만큼 그들도 엄격하고 완강하다. 내가 제시한 가격을 듣고는 기함을 하며 어떻게 그런 가격을 말할 수 있냐며 날 희대의 스크루지처럼 쳐다본다. 내가 지금 무리하고 있는 건가? 살짝 흔들렸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 가격이 싫으면 다른 사람에게 가면 돼.


"오케이! 바이 바이!"

"잠깐만 잠깐만!"


내가 쿨하게 발길을 돌리자 절대로 더 에누리는 없다는 것처럼 완강한 표정을 짓던 그들이 황급히 나를 붙잡는다. 그리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내가 마음을 돌려주길 요청한다.


"나카산! 앤 남자 친구!"

"왓? 보이프렌드?"

"힘! 힘! (A를 가리키며)"


내 앞에 있는 이 무리들을 A, B, C, D, E로 이름을 짓는다면 그중 A가 가장 낫긴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중에서.


"Who?"

"Him! Handsome boy! 낙카산! and today's boy friend!"


차암나. 내가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안 잘생긴 남자보고 잘생겼다고 하는 거다. A가 가진 장점은 나머지 B, C, D, E 보다 젊다는 것뿐이었다. 거기다 오늘 네 남자 친구로 같이 놀게 해 줄 테니 에누리를 그만 하잖다. 지금 생각해보니 성희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 내 가슴속의 불길이 날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단호박으로 만들었다.


"핸썸?!?! 핸썸?!?!? 노! 낫! 핸! 썸!"


잘생기지 않은 남자를 잘생겼다고 하길래 잘생기지 않았다고 말을 했는데 A를 비롯한 B, C, D, E가 큰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얘를 잘생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 너희 진심이었구나. A는 살짝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아니야. 기분은 내가 상했어. 돈은 내가 내는데 할인 대신 잘생기지 않은 남자를 끼워준다고 하면 좋겠니.


사실 난 그때 'Ugly'라는 세상 무례한 단어를 입 안에서 막았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었다. 하지만 A의 시무룩하고 의기소침한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그냥 웃고 넘기면서 살짝 의미 없는 플러팅을 했다면 오히려 서로 기분도 좋고 할인도 더 해주었을까? 하지만 돈이라는 냉정한 자본주의 아이템도 나의 본심을 막아내진 못했다.


글을 쓰면서 되새겨보니 '낫 핸썸'이라는 말을 한 세 번은 더 한 것 같다. 농담 한번 했다가 된통 기분만 상해 버린 A에게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잘생겼다는 말도 A가 한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이 한 것이다. 더 미안하네)


하지만 자본주의 한국어라도 장사를 할 때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이왕 자본주의 한국어를 구사한다면 나쁜 말 말고 예쁜 말을 하면 좋겠다. 나쁜 말을 한국인들 면전에 던져버린 호핑투어의 직원이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난 컴플레인을 걸지 않았다. 사실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호핑투어의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릴 때, 자동적으로 그 단어도 내 머릿속에 같이 떠오른다. 아무튼 누가 가르쳐 준 건지,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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