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맘 안 상하고 돌아오기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중심가까지는 벤으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메인 거리로 오는 내내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우리가 머물기로 한 숙소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호텔이다. 호텔이라기보다는 B&B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로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공간이 아닌 건물 입구에 자그마한 책상이 바로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풍채가 좋은 이스탄불 할아버지는 우리의 여권을 복사하다가 눈을 찡긋하며 묻는다.
"Are you twins?"
나와 친구는 서로 마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정말 다르게 생겼는데 왜 갑자기 쌍둥이?
"What? No~~"
"But I found something~"
장난기 짙은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는 양 손에 우리의 여권을 하나씩 들고 내밀었다. 아저씨의 손가락은 정확히 우리의 생년월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198X. 06. 19
198X. 06. 19
"Oh, We are not twins, but soulmates"
셋은 비좁고 어두운 로비에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도 나도 알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13년 동안 친구였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일이 똑같다. 그리고 처음으로 같이 장기 여행을 떠났다.
30살이 되던 해, 나와 친구는 터키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나는 혼자서 유럽 여행을 몇 차례 간 적이 있고 짧게 일본도 여러 번 다녀왔다. 친구는 짧은 거리의 여행은 다닌 적이 있지만 회사원의 신분으로 약 2주가 조금 못 되는 여정을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상사가 다녀오라고 한다고 해도 회사원이 연차를 최대한 붙이기는 쉽지 않다. 처음 시도하는 그 한 번이 매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저질렀다. 마침 그 해 5월에는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석가탄신일이 다닥다닥 붙어서 평일을 휴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 비행기표는 꽤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른 살이 되었고 비행기표는 감당할 수 있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나 역시 베스트 프렌드와의 여행은 처음이었다. 친구 무리들과 함께 1박 2일로 국내 여행을 한 적은 몇 번 있지만 단 둘이서 약 2주 남짓한 시간을 오롯이 보내야 한다. 분명 재밌을 테지만 가슴 한편으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냐면 살면서 친구와의 여행에 관한 괴담(?)을 한 번씩 들은 경험이 있지 않나.
정말 친한 친구였는데 같이 여행 갔다가 절교했어요
안 돼!
20살 때 고등학교 때 친구 1명과 일본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인생 첫 해외여행이었다. 딱히 싸우지도 않았고 즐겁게 3박 4일을 보냈지만 그녀도 나도 다시는 함께 여행을 가지 않는다. 난 그녀가 나보다 일본어를 잘하면서 길을 물어볼 때마다 뒤에 멈춰 서서 나만 바라보고 있던 게 싫었다. 아니 나보다 일본어를 잘하면 좀 앞에 나와서 날 거들 수는 없나. 나만 머슴인가. 그때는 구글맵이라는 게 없어서 가이드북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야 했던 시절이라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나보다 훨씬 활달하고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얻는 성격이라 더 서운했다. 물론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차니 '낯선 사람에게 외국어로 말을 건다는 것' 자체를 친구가 어려워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그 친구와 다시는 여행을 같이 가지 않을 것이다.
터키 여행을 앞두고,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 난 나만의 규칙을 세웠다.
1.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내가 처리하자. 얘가 할지 말지 눈치 보지 말자.
2. 힘들 땐 힘들다고 얘기하자. 말없이 얘가 알아서 해줬으면.. 하고 혼자 기대하고 혼자 서운해하지 말자.
3.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나 먹고 싶은 것에 대해 의견이 맞지 않으면 따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4. 일정 중간에 휴식 타임을 갖자. 계속 강행군을 하기보다는 중간에 쉬면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자.
그리고 친구에게도 말을 했다. 나이 서른에 가는 여행인데 어린아이들처럼 뭐든지 다 같이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서로 대화를 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잠깐 따로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아마 친구는 지겨웠을 것 같다. 몇 번이나 강조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소중한 친구이기에 맘 상한 채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여행 내내 친구와 나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고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아직도 제일 친한 친구다. 그 뒤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같이 여행을 간다. 체코, 오스트리아, 일본, 사이판, 코타키나발루 등등. 우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고등학교 때에는 3년 내내 붙어있다가 성인이 되고 각자 대학이 달라지고 직업이 생기면서 10년 동안 그냥 평범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낯선 도시에서 단 둘만이 내내 붙어있게 되자 우리가 얼마나 환상의 콤비였는지 떠올랐다.
서로 서운하거나 싸울 것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물론 그렇기 되기 위해서 나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서로 알게 모르게 노력했던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의 매일 밤 에페스와 와인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다 보니 이야깃거리도 많고 풍부했다. 낮에는 바람이 선선한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서로 가져온 책을 읽었다. 계속 말하지 않아도 되는, 한 시간쯤 침묵 속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는 사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일이 같으니까. 똑같은 띠를 가지고 똑같은 별자리 아래에서 태어났으니까. 유치하지만 의미부여가 된다. 서로 베스트 프랜드인데 생일까지 똑같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터키 여행은 우리에게 특별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전에도 사이가 좋았지만 그 이후 더 서로를 알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단언하건대, 너와 나 사이 흐르던 강물에 그때 다리가 완공되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차곡차곡 열심히 토대를 쌓고 있었지. 지금까지도 다리는 매우 튼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