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삐가 8살 되던 해였다. 노묘까지는 아니지만 어린 나이도 아니기에 8살이 되고 난 걱정이 많아졌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중년이나 마찬가지라는데, 과연 우리 애는 건강할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건강검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직장 안 건물에 펫샵이 있었고 난 그곳 의사 선생님과 안면이 조금 있었다. 선생님께 여러 가지 물어보고 조금 할인도 받기로 한 후, 쉬는 날 난생처음으로 반려동물 건강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대체적으로 건강했다. 하지만 신장 수치가 조금 나빴다. 고양이는 나이 들수록 신장이 쉽게 망가지는데 한번 망가지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고 한다. 먹는 약이 있기는 한데 매우 비쌀뿐더러 진행을 늦출 뿐 낫지는 않는다며 추천하지 않았다. 대신 물을 많이 먹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비만. 우리 애는 많이 먹지 않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비만 결과가 나와서 조금 충격이었다. 나이가 들어 움직임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뱃살이 쪘다고. 의사 선생님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앞으로 움직임이 더 적어질 텐데 지금부터 관리를 하라고 당부했다.
처음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나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문제점을 알았으니 빨리 개선해서 함께 오래오래 살아야겠다! 빨리 건강검진을 받게 한 스스로가 매우 뿌듯했다. 큰 병은 없으니 이제부터 잘 관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을 많이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삐가 물을 많이 먹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우리 애는 신선한 물을 좋아한다. 물그릇에 물이 가득 차 있어도 내가 퇴근하고 오면 나를 졸라서 부엌 싱크대로 향하게 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며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난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늑장을 부리다가 싱크대 앞에 서곤 했다. 물을 틀고 컵에 받고 있으면 싱크대 위로 훌쩍 뛰어오른다. 무려 컵을 코 앞까지 대령해야 꼴깍꼴깍 맛있게도 마신다. 난 매일 이삐를 싱크대 앞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그럼 비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평소에 많이 먹는 애가 아니었기에 반려묘 다이어트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지금은 '고양이를 부탁해' 같은 방송도 있어서 정보를 얻기 쉽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집사와 함께 하는 사냥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매일 더 성의 있게 사냥놀이를 함께 하였을 텐데 그때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다이어트 사료'를 먹이자!
난 X팡에서 글루텐프리 사료를 구매했다. 글루텐프리 사료에 대한 설명을 보니 그것만 먹이면 만사 다 해결될 것만 같았다. 체중조절! 관절 건강! 신장 건강! 알레르기 예방! 등등. 우리 애는 관절도 튼튼했고 알레르기도 없었는데 왜 하필 글루텐프리에 꽂혔을까. 다이어트 사료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닐 텐데. 난 글루텐프리 사료를 바로 구매했다. 그것도 6kg짜리를^^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킬로수까지 밝히며 사료 이야기를 쓰는 이유를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딱히 식탐도 선호하던 사료도 없었던 애였기에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6kg짜리 사료를 샀다. 무게가 무거울수록 저렴한 건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 그것만 먹일 테니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고양이는 그 사료를 먹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어떤 사료를 사줘도 군말 없이 먹던 아이라 난 더 당황했다. 이삐는 내가 무슨 사료를 줘도 잘 먹었다. 건식 사료도 브랜드 별로 줘봤는데 잘 먹었고 습식 사료도 딱히 선호도가 없었다. 주면 잘 먹었다. 그런데 글루텐프리 사료는 몇 번 냄새를 킁킁 맡고 한입 먹는 듯하더니 더 이상 입을 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요? 밥에 까다로워졌던 게?
6kg짜리 사료가 그냥 쓰레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난 먹지 않는 이삐를 원망했다. 아니 이게 6kg인데! 가성비 생각해서 샀지만 한 번에 드는 돈이 크다고! 이거 네가 안 먹으면 누굴 주니!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이렇게 애원해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난 애가 까다롭다고 투덜거리며 새 사료를 주문했다.
1년 후, 난 영국으로 혼자 여행을 갔다. 유럽을 왔다 갔다 하는 비행은 여러 번 겪어봤다. 대략 10~12시간 정도 걸리는데 식사 2끼와 간식이 나온다. 그걸 다 먹고 있으면 온 몸에 가스가 차는 기분이다. 기내식은 밥이나 빵 등 탄수화물 반, 고기 반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간식으로는 대부분 피자가 나온다. 또다시 탄수화물! 그러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온 몸이 무겁고 찌뿌둥하다. 마침 알아보니 특별 기내식이 있었다. 그중 나는 '글루텐프리' 기내식을 신청했다.
글루텐프리식은 나쁘지 않았다. 밀가루, 호밀, 귀리, 쌀 등 곡물류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계란, 고기, 야채, 생선 등이 있어서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었다. 간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피자를 먹고 있을 때 난 가볍게 과일을 먹었다. 그렇게 먹고 비행기에서 내리니 오히려 식욕이 돌아서 현지 레스토랑에서 마음껏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귀국할 때도 계속 글루텐프리식을 먹었다. 마지막 끼니 중 빵이 하나 있었다. 글루텐프리 빵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건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해하며 한입 베어 물었다. 퉤, 바로 뱉어버렸다.
빵에서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잼이나 버터 등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따뜻하지 않아도 빵에서 나는 풍미가 있는데 정말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그저 종이였다. 종이 씹는 맛 밖에 나지 않았다. 단 한입이었지만 그걸 넣었던 내 입이 불쌍해지는 맛이었다. 그리고 뱉자마자 떠올렸다. 이삐야!!!! 네가 이런 기분이었니!!!!
그 맛대가리 없는 사료를 안 먹는다고 널 원망하다니! 내가 죽일 놈의 집사다! 얼마나 끔찍했으면 한 입 먹고 안 먹었을까.
이삐는 맛없는 사료를 사 와서 당당하게 준 집사를 용서해 준 아량이 큰 고양이이다. 심지어 왜 안 먹느냐고 잔소리까지 했다. 글루텐프리의 트라우마일까? 이후로 이삐는 더 까다로운 고양이가 되었다. 츄르는 원래부터 싫어했는데 요즘은 습식 캔도 곧잘 가린다. 음식에 대한 확고한 취향을 보여줄 때마다 내 가슴이 따끔거린다. 혹시 그때부터 집사에게 호불호에 대해 단호하게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건 아닐까? 매번 거절당한 사료와 캔을 친구 집사에게 넘길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내가 또 의도치 않게 돈을 기부했구나...
최근에는 한 번 크게 앓은 뒤로 습식 사료를 입에도 대지 않아서 쉬어가는 중이다. 여름이 지나고 조금 더 기운을 차리면 다시 파우치를 뜯어봐야겠다. 네가 무엇이든 잘 먹을 거라며 오만했던 집사를 용서해주렴. 맛있고 비싼 걸로 바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