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을 내보이며 싸운다는 것.
프로게이머 레전드 중 한 명인 이제동은 전성기 시절 정말 기세만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불리한 상황이라도 전투가 벌어지면 이제동의 유닛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미친 듯이 싸워대며 승리를 가져왔다. 널리 알려진 엄청난 연습량, 특유의 승부욕과 눈빛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유 있는 운영, 유연한 플레이, 겸손한 인터뷰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제나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이 맹렬하게 달려들어서 승리하곤 했다. 그만큼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저렇게 모든 것을 걸고 싸우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지면 스스로 그 패배를 참을 수 있을까. 긴 슬럼프에 빠지지는 않을까. 실제로 그는 라이벌이자 스타크래프트 역사의 최강자 이영호에게 그런 패배를 종종 맞이하곤 했다.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의 결승전에서 패배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안쓰러웠다. 휘어지거나 넘어진 게 아니라 부러진 것 같았다.
스맨파에 출연 중인 크럼프 크루 '프라임킹즈'의 리더 트릭스를 보면서 10년 전의 이제동이 떠올랐다 트릭스는 출연하는 동안 편한 말투나 가벼운 눈빛은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다. 위기에 빠질 때마다 본인은 최고이며 특히 자신들의 주종목인 배틀에 있어서 만큼은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비장한 눈빛과 표정으로 내비치었다.
하지만 팬덤에 크게 좌우되는 대중적인 평가와 함께 승패를 어떤 식으로든 가르고 마는 방송 시스템은 결국 '프라임킹즈'를 첫 탈락 배틀까지 내몰았다. 여기서도 역시 그는 한치 물러 서지 않았다. "왜 내가 최초이자 마지막 동양인 챔피언인지 보여주겠다." "5경기까지 가지 않고 끝내버리겠다."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단호한 말투와 눈빛으로 표현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일대일 무대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보였고 엠넷 피디와 작가들은 그런 자극적인 캐릭터의 인터뷰를 놓칠 리가 없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도 정점에 오른 댄서들인데 저렇게 까지 강하게 말해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벹어 놓은 말이 있으면 그만큼 스스로에게 부담이 될 것이었고 혹시 패배한다면 그 충격이 너무 크게 다가올 발언들이었다.
반면 탈락 배틀 상대인 '뱅크투브라더스'팀은 여유 있는 표정들이었다. 멤버들 모두가 승패에 연연하기보단 즐기면 된다는 태도였다. 특히 리더인 제이락은 인터뷰 때마다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승리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내 춤을 추겠다는 쿨한 태도를 보였다.
5판 3선 승제, 1대 1 상황, 제일 중요한 3번째 게임은 리더들 간의 대결이었다. 그렇게까지 배틀을 자신 있어하던 트릭스는 박빙의 승부 끝에 리더 대결에서 패배하게 된다. 3번째 게임을 내준 프라임킹즈는 결국 3:2로 탈락하고 말았다. 배틀 전문 크루 중에 하나로 출전했지만 8 크루 중에 첫 탈락이라는, 실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트릭스는 승리를 확신했던 만큼 패배의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리더로서 본인이 패했고 팀원들에게 부담까지 넘겼다는 자책까지 더해지며 눈물을 보였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정점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많은 대중들 앞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가 스맨파이다. 첫번째 탈락은 지금까지 십수 년간 쌓아온 스스로의 커리어에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호언장담 하다가 당한 패배였기에 그 상처가 더 커 보였다.
그런데 그 충격과 패배의 눈물을 보면서 묘한 아름다움 같은 게 느껴졌다. 댄서 트릭스가 가진 진실을, 그의 진짜 모습을 선명하게 목격한 느낌이랄까. 가진 모든 것을 걸고 핑계나 변명 없이 처절한 패배의 결과를 받아 든 그 모습에서 그 사람이 가졌던 춤에 대한 사랑, 열정, 노력, 자부심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에게는 실로 멋진 장면이었다.
만약 상대팀인 '뱅크투브라더스'가 졌더라면 리더 제이락은 이렇게 인터뷰했을 것이다. '우리는 즐기면서 우리의 춤을 췄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승패는 있지만 우리는 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태도도 멋지고 쿨한 태도임이 분명하다. 졌잘싸.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는 모호한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잔혹한 현실 세계에서 정신적으로 살아남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끝은 아니니까, 연습이라 생각하자, 좋은 경험이었다, 즐겼으면 되었다.' 다 스스로의 마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태도이다. 하지만 정말 가끔씩 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내보이며 온몸으로 승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트릭스처럼. 그런 사람들은 왠지 승패를 떠나서 아름답고 낭만적인 면이 분명히 있다.
이제동은 결국 라이벌 이영호를 넘어서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해 메이저 대회 결승에 4번 모두 올랐지만 3번 이영호에게 패배하며 3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이영호는 그렇게 스타크래프트의 신이 되었지만, 이제동의 그 강렬한 모습은 많은 프로게이머 지망생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후배 LOL 프로게이머들의 인터뷰에서 롤모델 혹은 영감을 받았던 프로게이머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이영호가 아니라 이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