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케 팔러의 <100 인생 그림책>을 보고
발레리오 비달리의 멋진 그림이 있는 이 책을 다시 본다. 100세까지의 인생의 장면들이 100페이지마다 펼쳐진다. 순서대로 보면 순식간에 한 인생을 훑게 되는데, 보고 싶은 나이부터 펴봐도 되고 시간 순으로 봐도 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그 장면에 들어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감대가 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는 어느 장면에서 멈추게 되었다. 이 포즈는…? 탱고잖아! 맞다. 장면 속의 사람들은 탱고의 동작을 하고 있었다. 노년의 그들이 서로 기대어 춤추는 그건 바로 아르헨티나 탱고였다. 결혼 전까지 흠뻑 빠져서 추곤 했던 탱고였다. 그래서 이 책을 빌미로 항상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탱고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결혼을 하고 육아 7년째인 지금은 탱고를 추고 있지 않다. 하지만 주말 저녁이면 가끔 탱고 음악을 틀어놓고 상념에 잠길 때도 있다. 또 가끔 마트에서 카트를 끌 때엔 아무도 몰래 볼레오를 해보기도 한다. 몸을 잘 세우고 걷는 탱고의 걸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건 아직까지는 즐겁다. 몸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볼레오는, 볼레오는 말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탱고를 추는 사람과 결혼했어야 했을까? 이미 늦었다. 모든 것이 느슨해지는 일요일 저녁이면 탱고 음악에 느리게라도 몸을 움직여 본다. 그냥 음악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너무 어려워.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58세의 장면에 나오는 말이다. 이 장면의 사람들은 모두 탱고의 동작을 하고 있다. 탱고를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여기 나온 볼레오(Boleo) 동작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노란 옷을 입은 여자의 왼다리가 뒤로 올려진 동작이다) 이 동작의 대상은 바로 상대편이다.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 또는 동성이라도.
볼레오(Boleo)는 이렇다. 춤을 추다가 남자가 여자의 상체를 갑자기 멈추게 한다. 그러면 그 반동으로 여자의 다리가 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남자의 다리를 감기도 하고, 허공에 채찍처럼 곡선을 그리게 된다. 내가(여자가) 주도해서 먼저 할 수도 없고, 리드를 받으면 내 역량껏 할 수 있다. 그런 내 팔로우가 상대방에게 영향을 준다. 팔로우를 적극적으로 하기 싫으면 꼼짝도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잘못 전달되면 사이가 안 좋아지고, 다음에 또 신청을 못 받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몇 딴따(Tanda, 춤을 추는 시간)가 지나도록 벽의 꽃처럼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매우 슬픈 일이다.
처음엔 이 볼레오라는 동작이 장식으로 보였다. 그런데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동작이 파트너를 잘 만나면 나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잘 추는 사람의 리드를 받으면 내가 좀 못하더라도 아름답고 탄력적인 볼레오가 된다. 그러다가 잘 추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리드를 내가 섬세하게 받아도 볼레오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이 둘 사이엔 몸에 힘을 빼고 다시 내 몸을 세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이가 좋다는 것은, 누군가의 리드에 누군가가 팔로우를 맘껏 받아내도 관계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충실하다는 것이다. 탱고는 특히나 서로의 커넥션이 눈에 보인다. 팔과 팔이 연결되어 있고 가까이 안고 추게 되면 서로의 가슴과 가슴이 닿게 된다. 그 가까움 속에서 서로 끌려가지 않고 서로 밀기만 하지 않고 사이좋게 춤을 춘다는 것은 생각보다 상대방의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상대에게 초 집중하여 함께 걷는 걸음이 바로 탱고였다.
물론 탱고는 볼레오를 잘 못해도 즐길 수 있다. 그저 음악에 손잡고 산책하듯 걷는 걸음이어도 된다. 그러니 사이가 혹시 안 좋아지더라도 조금은 기다려주고 다음 기회에 만나면 어떨까? 탱고스럽게 이야기해 보면 다음 딴따(Tanda, 춤을 추는 시간)를 기다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내 소리를 잘 내었는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대부분이 상대방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받아들여 오히려 내가 미리 움직이게 되기도 했다. 나의 경우는 조금 더 진득하게 상대방의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느낀 다음 내가 움직여도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기까지는 아까 말했던 시간이 필요했고 실제로 다리 근육도 얼마간 필요했다.
처음에 탱고 음악을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Francisco Canaro의 곡 <Silueta Portena>에 맞춰 춤추는 두 쌍의 커플의 춤에 빠지고 음악에도 빠졌던 것 같다. 탱고의 빠른 춤곡을 밀롱가(milonga)라고도 하고, 탱고를 추는 곳을 밀롱가라고 하기도 한다. 이 빠른 밀롱가 곡이 나에게 주는 첫 느낌은 너무 묘했다. 울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아마 울고 싶었는데 마침 울게 만드는 음악과 만난 것일 거다. 탱고의 모든 곡은 장조가 아닌 단조이다. 그래서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나는 탱고 음악이 무척이나 좋았더랬다.
또 하나의 탱고 장면은 74세의 아브라쏘 장면이다. 아브라쏘(abrazo)는 안기, 포옹이다. 정말 이렇게 몸을 포개고 춤을 춘다. 누군가 정분날 것 같은 포즈라 이야기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나랑 딱 어울리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어." 어쩜 딱 이렇게 아브라쏘의 마인드일까!
이런 마음으로 매번 같은 사람과도 새롭게 춤을 추고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잘 안되더라도 마음만은 그렇단 얘기다. 이렇게 상대에게 기대어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이 춤은, 상대방에게 무작정 몸을 기대 버리면 서로가 힘들게 된다. 그 밀접한 사이에도 공간이 있어 그 공간을 지켜주거나 서로 내놓지 않으면 너무나 힘든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런 힘든 기억은 춤 신청을 주고 받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신청이 와도 애써 까베세오(cabeceo, 눈짓)를 못 본 척하게 되기도 한다. 역시 슬프고 귀찮은 일이다.
따뜻하고 포근한 아브라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시간이 생각난다. 지금은 어떤가? 옆에 있는 남편과 아이를 본다. 당연히 포근하게 대해야 할 사람들이 일상이 되니 이것도 쉽지 않다. 아브라쏘의 마음이 잘 안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뭔가 잘 안될 때 남편과 아이가 신경 써주고 그들이 잘 안될 때 내가 좀 더 다가간다. 탱고처럼 그렇게 기다려주고 내 공간을 내어주고 그들의 공간에 쑥 들어간다. 그렇게 걸음을 이어가고 텐션을 유지한다. 둘보다 셋이 추는 탱고이니 공간도 넉넉하고 그래서 조금은 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