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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Oct 21. 2024

다시 10월, 뉴욕

Chapter 2.  Overview, Art & Culture 


메가시티 한 바퀴 


[ 브루클린 브릿지 ] 

 서울에서 뉴욕으로, 13시간을 되돌려 발 디딘 이곳의 이질적인 거대함을 실감하기 위해 도시 내부를 벗어나 표면에 닿고 싶었다. 실제로는 낯설지만 나도 모르게 누적된 이미지 때문에 익숙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모순적인 대도시의 전경을 할 수 있는 만큼 가득 두 눈에 담으려 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관광의 첫날 아침을 맨해튼이 아닌 브루클린 초입에서 맞았다. 어젯밤을 보낸 맨해튼의 남쪽을 떠나야 비로소 그 맨해튼을 바라볼 수 있으니. 맨해튼은 서쪽의 Hudson River와 동쪽의 East River가 흐르는 섬이다. 아마도 지구에서 가장 비싼 섬일 것이다. '이서진의 뉴욕뉴욕' 유튜브의 부동산 룸투어를 보면 휘트니 뮤지엄 접경의 West Village 월세는 One bedroom이 3,900달러 (약 600만원), Two bedroom이 4,950달러 (약 700만원)이고 구글 캠퍼스가 있는 Chelsea의 방 4개짜리 럭셔리 콘도 매매가는 930만 달러 (약 125억), 한 달 세금 및 관리비가 11,000달러 (약 1,480만원)에 이른다. 지도상 좌측의 저지 시티, 그 위의 뉴저지, 우측의 브루클린 거기서도 좀 더 위쪽의 핫플레이스 윌리엄스버그까지. 맨해튼을 둘러싼 이 도시들이 다리를 놓고 그 꺼지지 않는 불빛을 바라보는 이유일 것이다. 도착 첫날, 공항에서 택시 기사님의 실수로 이탈된 경로에서 우연히 만난 윌리엄스버그 브릿지에 이어, 좀 더 나란히 놓인 푸른빛의 맨해튼 브릿지, 회색 돌과 우드톤의 브루클린 브릿지를 걸어보고 싶었다. 뉴욕 여행의 시그니처 인증 장소가 된 덤보의 붉은 벽돌 사이로 보이는 다리는 맨해튼 브릿지였지만 실제 사람들이 전경을 즐기며 많이 걷는 브루클린 브릿지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와이파이가 그려진 한국의 신용카드로 지하철을 타고 브루클린으로 넘어가 덤보를 들린 뒤, 로컬 다이너들이 모인 푸드코트 '타임아웃 마켓'에서 다리를 바라보며 스콘이 3개나 포함된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를 즐겼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패기 넘치게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검색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저기 보이는 다리를 어떻게 올라갈 수 있는지 도무지 시작점을 찾지 못하고 한참 헤맨 것이다. 두세 번의 잘못된 길을 되돌아가며 결국 맨해튼 방향 시작점까지 거슬러 올라 걷게 되었다. 

보행자와 자전거, 차량까지 한 방향이지만 높낮이를 달리하도록 설계된 이 다리는 알고 보니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City hall과 부촌으로 알려진 Tribeca를 연결하고, 맨해튼 브릿지는 우리가 가고 싶었던 딤섬집이 있는 차이나타운을 연결했다. 진입하기까지 어수선했지만 약 1시간에 못 미치는 시간 동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새로운 눈높이로 맨해튼의 마천루와 좌우의 East River, 저 멀리에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하는 벅참은 이번 여행에서 손에 꼽히는 순간이었다. 성공에 대한 야망과 도전, 그 치열한 전리품들을 마주하려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 고층건물이 이룩한 이 자본집약적 도시에서 탁 트인 뷰를 갖는다는 건 소득의 구분을 의미하는데 이곳은 모두가 무료로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의 공간 같았고 하이라인 파크도 유사한 아이디어의 발상으로 느껴졌다. 다리의 끝에 펼쳐진 City hall park 앞에서 5달러짜리 물을 마시며 다시 Pier 방향으로 내려갔다가 차이나타운, SOHO로 향하는 비효율적인 동선으로 고생했지만 그저 앞을 향해 걷는 단순함 속에 가득했던 경이와 희열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 서클라인 크루즈 ] 

 맨해튼을 둘러싼 강들을 오가는 크루즈들의 여러 노선이 있지만 첫날 택시기사님이 강력 추천하신 '서클라인' 크루즈를 예매했다. 미드타운 Pier를 시작으로 사실상 섬 (리버티 섬)에 떠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뒤 맨해튼의 East Village와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 무렵을 지나 되돌아오는 노선이었다. 그동안 여행했던 도시들에서도 크루즈는 한 번씩 체험해 보는 편이었지만 너무 추웠던 기억에 굳이 더 비싼 선셋보다 점심 무렵 시간을 택했다. 여분의 옷까지 껴입고 매점에서 산 냉소적일 만큼 심플한 핫도그를 베어 물며 눈부신 가을 햇살 아래 바라다보는 뉴욕의 외관은 거대한 성벽 같았다. 탑승객들의 열심히 눌리던 셔터는 역시 자유의 여신상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일어나 좀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그녀의 인상은 배에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선의 한계 때문인지 눈 언저리가 그림자에 비쳐 준엄하고 강단 있는 중성적인 이미지였다. 19세기말,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며 선물한 동상은 Melting pot이라 불리며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뉴욕의 거리에서 목격한 자유의 얼굴은 정의롭되 마냥 온화하지 않았다. 큰 개와 함께 도보를 달리는 백인들의 균형 잡힌 신체와 낯선 향을 풍기며 구걸하거나 쓰러진 흑인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무는 내내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유럽 여행의 기억을 환기하며, 한인 택시 기사님께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분의 대답은 이랬다. "그 보다 훨씬 더 한 것 (총이나 칼)이 겨눌지 모르니 누가 함부로 그러겠어요?"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보장하되 쓰러진 자를 적극적으로 일으켜 세우지 않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제공하되 가장 보통의 지하철에 투자하지 않는, 자본에 따른 옵션을 명확히 인정하는 뉴욕의 자유는 무뎌져버린 서울의 자유를 떠올리게 했다.        


[ 서밋 전망대 ] 

 가장 직관적으로 맨해튼의 도심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여러 옵션이 있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이제는 오를 수 없게 폐쇄된 토마스 헤더윅의 베슬을 아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 아쉬웠지만, 바로 인근의 역삼각형 발코니가 인상적인 '에지'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바로 옆의 전면 유리가 그려내는 스펙터클한 관광객 뷰의 '서밋' 두 곳이 고민 대상이었다. 결국 뉴욕에 다녀왔다는 보다 강렬한 인증숏을 남기기에 적합한 서밋을 선택하고 평일과 주말, 선셋 시간대에 따라 가격 차등이 있는 선택지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을 골랐다. 실제 경험해보고 나니 인상적이었던 점은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갔다 내려오는 단순한 여정을 최대한 테마파크처럼 극적으로 구성한 기획의 구현이었다. 밴드형 티켓을 손목에 차고 보안검사 행렬을 마치면 이곳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과 공사 현장이 담긴 영상을 본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상단의 카메라를 보고 그룹별 사진을 찍은 뒤 선글라스를 하나씩 집어 들고 (3D 효과 등 특별함을 기대했지만 실질적으로 선글라스 기능에 그쳤던), 개인별로 얼굴 인식 스캐닝까지 마치면 드디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곧 눈앞에 펼쳐지는 예상했음에도 압도적인 전면 거울 마감의 전망대는 대형 보이드를 뚫은 2개 층의 수직 공간으로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전망대 이상의 비일상적인 Immersive 경험을 선사한다. 작은 구멍에 초점을 맞추면 알록달록한 종이 가루들의 나부낌이 그 작은 거울의 방을 가득 메우던 어렸을 적 놀잇감이 생각났다. 사각형의 공간은 360도 통창으로 전망대 본연의 기능도 톡톡히 한다. 사방을 돌며 마음에 드는 건물을 배경으로 골라 사진을 남기기도 탁월하다. 실버 재질의 아트피스를 지나면 또 역시 실버 컬러의 풍선들이 가득 찬 방을 헤엄쳐 나와 2층 전망대에 이른다. 조금은 유치하지만 하늘을 나는 듯한 동영상 배경의 포토존을 즐기고 나면 루프탑 바 라운지가 등장한다. 내려가는 길엔 굿즈샵이 나오는데 그 앞의 키오스크에서 지정 번호를 입력하면 먼저 찍었던 그룹 사진이 서밋 안의 여러 공간에 합성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의아했던 것은 개인별로 진행한 얼굴 스캐닝이 별도의 결과물로 확인되지 않아 (혹은 놓친 것인지) 보안의 용도였나 싶었던 점이다.   



뉴욕은 재즈 


[ 블루노트 ] 

 탐독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에서도 줄곧 등장하는 재즈는 음악 편식이 있는 내게 꽤 낯선 장르였다. 그러다 위플래시, 터미널, 픽사의 소울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그 공통된 배경이 뉴욕이고 주인공들의 주요 서사가 재즈라는 점에서 '뉴욕은 재즈'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각인됐다. 부리나케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도 마지막 숙소의 위치가 링컨센터, 줄리아드 음대와 가까우니 세계적인 수재들의 무료 공연을 한 번은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학교 홈페이지의 스케줄을 확인하며 욕심을 냈다. 결국 여행의 피로에 지쳐 그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정오에 도착했던 뉴욕의 첫날, 긴 낮잠을 자고 어느새 해가 떨어진 휴스턴 거리를 걷다 즉흥적으로 블루노트까지 향했다. 제대로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인지 한국에서는 접속이 되지 않아 예매하지 못한 공연 티켓을 현장에서 줄을 서면 얼마나 기다려서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저녁 일곱 시 반 무렵의 일대는 분위기 좋은 바들이 사람들에 붐볐고, 3번째 그룹 순으로 줄을 선 블루노트의 맞은편엔 코미디 극장이 역시 꽤 긴 줄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뒤로도 한참 이어지는 줄을 보며, 그럼에도 어디까지 유효하다는 제재가 없는 가드를 보며 어떻게 이 인원들이 잔여석으로 수용될 수 있을지 아리송했다. 8시 공연을 기다리던 줄은 그러나 8시가 넘고 8시 반을 향해 가도록 계속 기다림을 요구했다. 기다리며 보니 공연 시간이 임박하거나 지나서도 입장하는 티켓 소지자들이 꽤 되어 아주 진중한 분위기의 장소는 아닌가 짐작했다. 드디어 우리의 차례가 되어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카운터에서 Bar에 앉을지 Table에 앉을지 선택하라고 했다. 왜인지 미리 서칭 했던 가격보다도 높은 것 같았지만 무대에 가까운 꽤 앞자리의 측면 Table 자리로 안내되었다. 묘하게도 무대 정면 자리는 백인들이 많이 보였고 우리의 자리엔 흑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한창인 공연과 어두운 조명 아래서 맥주와 립을 시키고 잘 모르지만 도시의 정취가 담긴 음악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의 음악보다 기억에 남는 건, 빽빽한 좌석의 복잡한 동선을 지나며 음식을 나르고 계산을 해내던 서버들, 도무지 칼로 썰리지 않던 질긴 요리, 무대의 아티스트를 바라볼 수 없는 측면에서도 나름의 흥으로 음악 그 자체에 취하며 적극적인 호응을 보내던 뉴요커들, 졸음에 겨운 건지 음악을 즐기는 건지 눈을 감아버린 여행 파트너의 모습이었다. 


[ 카네기홀 프란츠 리스트 컴페티션 ]  

 국내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유럽 여행을 하며 그 도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명 오케스트라와 발레단의 공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정장과 드레스로 그야말로 드레스업을 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마다의 공연장 분위기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번 여행에서도 공연을 계획하며 원피스와 자켓을 챙겼다. 링컨센터에서 열리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파트너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협연을 노렸지만 도저히 표를 구할 수 없었다. 나 같은 초심자가 볼만한 공연이 있을까 뒤적이던 중 카네기홀에서 열리는 리스트 피아노 대회 결승에 오른 최종 4인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공연이 눈에 띄었다. 자유석으로 제법 앞자리 중앙을 차지하고 나서 둘러보니 일부 드레스업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좀 더 캐주얼한 차림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정식 공연이 아닌 대회여서 그런지 출전자를 응원하기 위해 온 지인들이 많은 분위기였다. 첫 순서는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김송현이었다. 4명의 출전자 중 유일하게 피아노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나머지 3명의 출전자는 모두 1번을 동일하게 연주했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주로 풍성하게 들렸던 음악들의 연주자별 디테일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전신의 움직임을 담아 표현해 내는 음색과 무게가 조금씩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운 표현의 김송현, 작은 체구에 온 힘을 실어 격렬함을 발하던 두 번째 주자 쉬안샹 우, 조금 긴장한 듯 굳어있었지만 정석적으로 깔끔한 연주를 들려준 드미트리 유딘, 유머러스하고 개성적인 테크닉의 용치우 리우까지 모든 연주가 끝났다. 현장에서의 분위기만으로는 세 번째, 네 번째 주자로 갈수록 관객 호응이 높아져 심사의 기준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했다. 한국에 돌아와 기사를 검색해 보니 1등은 김송현과 쉬안샹 우, 2등은 드미트리 유딘, 3등은 용치우 리우였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긴장과 열정, 몰입과 환희를 가까이할 수 있어 감격이었다.  


[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 ] 

 이번 여행에서 가장 거금을 투자한 공연으로 기대가 컸다. 몇 년 전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처음으로 전용 극장이 있는 뮤지컬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배를 모는 장면과 샹들리에가 움직이는 연출까지 있던 '오페라의 유령'보다 바닥의 높낮이가 움직이며 성난 군중들의 역동성이 돋보이던 '레미제라블'의 극장이 잊히지 않았다. 또 한 번의 충격을 기대하며 미국 소설인 오즈의 마법사, 그것을 재해석한 또 하나의 미국 소설 원작의 위키드를 택했다. Popular, Defying Gravity 같은 유명 넘버들은 들어봤지만 제대로 줄거리를 인지하지 못한 작품을 영어로 본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모험이었다. 같은 전용극장이어도 런던의 경우보다 포토존과 굿즈샵의 구성이 더 적극적인 편이었고 이곳 역시 공연 시간이 지나서 들어오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규정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 혹은 약간의 무질서가 왜인지 모르게 우리와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친밀감이 일었다. 그러나 공연장의 활용도 눈에 띄는 특색이 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해리포터 이전의 마법세계 팬들을 거느린 유서 깊은 작품임에도 내겐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생부터 남들과 다른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가 비로소 본인의 능력을 펼쳐가다가 사람들의 모함과 핍박을 받아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낭만주의자로 그려진 것이 아쉬웠다.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유색인종에게 가해지는 시련과 대비되어 백인에 의해 지배되는 평화의 세계가 불편하게 다가왔다. 인터미션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대부분의 관람객도 백인이 많이 보였다. 나의 섣부른 판단이 작품에 대한 이해 부족이길 바라며 다가오는 11월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한다는 영화를 기대해 본다.




미술관이란 여유, [ 메트로폴리탄 뮤지엄과 MOMA ]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가 구독하고 자주 찾아보는 유튜버들은 뉴욕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나름 성공한 언니들이 많았다. 그녀들의 일상 브이로그에 등장하던 휘트니 뮤지엄, 구겐하임, 모건라이브러리 뮤지엄 등 가보고 싶던 ART의 공간들이 많았지만,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에게 미술관을 탐닉하는 건 사치였다. 아니, 그보다 스스로를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 모드에 가둬놓는 나의 여정에 대한 선택과 판단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다음을 위해 남겨두자" 한 도시에서 최대한 본전을 뽑고 싶은 나와 달리, 여행 파트너는 한 도시를 여러 번 여행하는 타입으로 내가 주도한 타이트한 일정에 꽤 지쳐 보였다. 그래서 여행 중 유일하게 날씨가 흐린 이 날만큼은 꼭 가보고 싶은 2개의 미술관을 보고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고 깔끔하게 쉬기로 결정했다. 그룹 투어를 신청한 메트로폴리탄은 센트럴 파크의 입지를 살려 온실 건축 구조를 혼용한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스로마 시대 조각상이 전시된 공간의 천장과 측면에, 이집트 전시실의 측면에 적용된 사각 프레임의 유리 마감과 물에 비치는 그날의 풍광은 실내에 있지만 산책하는 듯한 신선한 개방감을 연출했다. 

가이드님께서 설명해 주신 이곳의 독특함은 한 전시실 내 이질적인 시대가 공존하는 창의적인 큐레이션이었다. 맵을 꼭 들고 다녀야할큼 거대한 전시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주요 작품들을 콕콕 집어주셨던 2시간 반의 투어를 마치고 미술관 입구 앞의 계단에 앉았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거리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간단한 음식을 즐기는 계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원이었다. 심플한 핫도그와 감자튀김에 아쉬웠던 우리는 그곳의 푸드트럭에서 할랄푸드에 눈을 떴다. 햄처럼 느껴지는 양고기의 질감은 반갑지 않았지만 분수 옆에 앉아 가득 입에 넣었던 기름에 버무려진 노란 쌀밥의 맛은 조금은 지쳐있던 우리에게 묘한 힘을 주었다. 여행하며 들린 도시들의 가장 시그니처 한 미술관 투어를 경험해 볼수록, 결국 나는 유명 작가의 유명 작품들보다 어떤 낯선 작가의 발견이나 유명 작가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작품들에 마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세계 최고의 최대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엄마와의 여행이 생각나는 노르망디 에트르타 해안을 그린 모네의 색감, 드가의 조각상에 입혀진 스커트의 직물을 체험해 보고 거대한 그림 앞에 앉아 설명을 듣는 어린아이들, 작품 앞에서 나름의 스케치를 그리던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현대카드 무료입장 찬스를 살려 다음으로 간 곳은 MOMA 현대미술관이었다. 상대적으로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MOMA에도 유리 벽면 너머의 작은 공원과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보여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제법 지친 상태라 우리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작품들이 몰려 있는 5층만 보기로 했다. 거의 미술 교과서 급의 스타 작가들의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하여 서로가 서로의 아우라에 밀리는 듯한 광경 속에서, 엉뚱하게도 난 클림트의 처음 보는 듯한 'The park'라는 한없이 푸르른 작품에 더 눈이 갔다. 도쿄, 홍콩에서도 보았던 MOMA Design Store의 플래그십이 미술관 내부와 그 건너편까지 있었지만 탕진을 불러일으키는 제품은 발견하지 못했다.  



P.S. 여행의 회고를 위해 사진들을 돌아보니, 언제나처럼 여행은 '내가 거기, 아주 잠시 스쳐갔었구나'를 떠올림과 함께 그 찰나를 붙잡으려 한정된 일정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지 선택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바지런함과 그런 계획들이 부질없이 어긋나는 순간과 충동, 아찔함과 애잔함이 뒤섞이는 결국은 잔망스러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계획'이 아닌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한 '대응'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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