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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Nov 11. 2023

투명망토 행진곡

「어둠의 심연」ㅣ 조지프 콘래드ㅣ 을유문화사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함을 자각할 때, 어둠의 심연은 눈을 뜬다. 타인이라는 지옥이 실상은 포효하는 욕망의 불구덩이로부터 나를 지키는 버팀목이었음을 시인한다. 이웃의 '보는 눈'은 종교와 법과 CCTV와 휴대폰의 렌즈로 진화했다. 그에 대한 의식은 상과 벌에 의한 차별을 요구하고 때때로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모르는 지역의 인파에 뒤섞일 때면 예의와 배려와 질서의 피로를 과감히 벗어던지기도 한다. 무지의 일탈이 선사한 자유는 그러나 기간 한정 판타지이다. 본인의 의사로 떠나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와 시간, 그만큼을 우리는 '문명'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복귀 가능선 너머의 케예르와 카를리에는 친구에서 적이 되어 서로를 겨눴고, 커츠는 대륙의 신사였던 자신을 죽이고 밀림의 포식자로 다시 태어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커츠가 바라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코끼리도, 원주민도, 회사도 아닌 자신이 상아의 주인이라는 최면에 빠진 채, 살생의 중독을 노동과 투쟁이라 포교하는 것. 그 많은 상아의 무덤으로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은 초월적 자아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을까. 급진적인 기인, 커츠보다 좀 더 높은 확률로 마주칠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섬찟한 인물은 마콜라였다. 실체 하는 자연 속에서 한없이 무능한 백색 피부의 관념적 문명인들이 몰락하도록 돕는 그는 교역소의 헨리 프라이스이자 원주민들의 마콜라로 두 개의 이름으로 산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호한 보호색으로 무장한 그는 문명의 쌀을 씹으며 그들을 감시하고 손발을 잘라 서서히 숨통을 죽여갔다. 문명의 탐욕을 이용하여 그들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노를 젓는 검은 뱃사공. 그가 사는 곳은 문명인가 자연인가. 그의 모습은 최후의 인간일까, 인간을 보호하듯 심판하는 신일까.   


 코로나의 글로벌 데뷔 몇 달 전 출국한 베트남 하노이에서 2년 간 주재원의 삶을 경험했다. 주 5일 룸 클리닝이 제공되는 레지던스엔 주재원 가족들이 모여 살았고 나도 그곳에 있었다. 한국인 동료들을 통해 안면을 튼 협력사 지사장도 이웃이라 애인과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을 이따금 마주쳤는데, 웬일인지 그는 종종 식사 쿠폰 같은 것을 내게 전해주곤 했다. 다시 국경이 열렸고 유모차를 탄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온 그의 멋쩍음을 보고 나서야 그의 과한 친절이 이해되었다. 먼저 파견 나왔던 동료 중 한 명은 살뜰한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랑꾼임을 과시하곤 했는데 현채인 직원들을 무시하는 언행과 태만한 업무 태도로 예정보다 빠르게 한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후 한국의 연수원에서 다시 만난 그는, 아무래도 다시 베트남으로 가고 싶다며 착실히 어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들의 비겁함을 냉소했지만 투명망토를 쓰고 또 다른 상아를 열심히 줍던 것은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 친구들과 맥주나 와인을 마실 때면 베트남에서 겪은 컬처쇼크 보따리를 풀곤 했다. 비자 발급을 위한 건강검진 중 갑자기 귓가에 'Where are you from?'을 속삭였던 청력검사, 어플로 탑승위치를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 없이 전화를 걸어 베트남어로 위치를 묻는 택시기사, 아이패드가 망가졌는데 부모님께 말할 순 없으니 돈을 빌려달라던 베트남어 선생님, 호수의 도시라지만 그 안으로 처리되는 쓰레기, 일 년째 지속되는 동네 도로 공사의 더딤까지. 그들의 음식과 풍광과 친절을 즐기면서도, 그들을 고객으로 모시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일을 하면서도 이방인의 우월감을 내려놓지 못했다.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동료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첫째 아들을 한국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베트남을 떠나기 전 마지막 두 달간, 한국어를 말할 줄은 알지만 이름도 못쓰는 그의 아이와 매주 토요일 오전에 만났다. 30분간 테이블에 앉히기도 힘든 일곱 살 남자아이와 씨름하는 동안, 아버지인 동료는 가끔 야단을 치고 유튜브를 열심히 봤다. 조금씩 간단한 단어들을 쓰게 된 아이를 가르친 것은 나도, 그도 아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적 없는 그의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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