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 (自負心). 어딘지 눈부신 이름 탓일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다. ‘자신을 짊어지는 마음’이란 건 대체 무엇인가. 고단하더라도 떳떳이 감내하겠다는 동사에 호응되는 목적어라면 내 착각만큼 화려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타인이란 촉매 없이 자가발전하는 긍정의 동력. 이를 위해 기꺼이 불빛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 사이 입추가 지났다. 2022년은 어느새 저울을 꺼내어 내 결실의 무게를 단다. 채 여물기 전에 따 버린 조그마한 푸른 열매와 경미한 바늘의 동요에 움찔한다. 겨우 이것뿐이었나. 작년 여름부터 난 몹시도 시간을 아까워했다. 베트남에서의 두 번째 해가 시작된 후로 연료 소진을 알리는 경보음이 점점 더 커졌기 때문이다. 나는 소모되고 있었다. 이질적 공간과 문화, 사람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더 이상 내 것이 되지 못했다. 후임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본사 담당자를 독촉하고 동생을 통해 서류를 제출한 뒤 초조하게 항공권을 붙들었다. 친구들의 배웅 속에 국제선 비행기에 올랐고 격리 해제 다음 날이 대학원 면접이었다. 대면과 화상으로 몇 곳에 응시했고 한 곳에 간신히 붙었다. '데이터 사이언스'란 최첨단 엔진을 장착했으니 미지의 목적지를 향한 순항이 재개될 것 같았다.
몇 달 뒤 조급한 열정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학문은 죄가 없었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그곳은 내게 길들여지지 않는 외계였을 뿐이다. 그러나 첫 학기가 끝나고 다음 학기 시간표가 공지된 지금까지 나는 이 소행성을 배회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의 피리 소리에 홀린 게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그저 나는 다시 불안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어 좌초했으므로. 불투명한 욕망 속을 끝없이 표류하던 중이다. 그런데 문득 내가 타락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 나를 버리고 누군가를 따라 하는 카피캣으로 말이다. 내가 정박한 곳은 정녕 나의 이상인가, 타인의 인정인가.
이제 이 세계의 혼탁함에 적응할지 저항할지 결정할 시간이다. 루시드폴의 노래를 듣는다. '처음 약속한 나를 데리고, 내 심장소리 하나 따라 걸어가자'라고. 낮은 목소리를 따라 담담한 자부심이 흘러나온다. 이 마음이 지려는 것들은 곧잘 외면당하는, 숨겨진 존재들이다. 두려움과 초라함, 무력감과 절망의 자식들. 그들을 번쩍 들어 올리려면 내 안으로부터의 연료가 필요하다. 내 어두운 순간과 실패를 사랑하겠다는 용기. 그렇게 나는 나를 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