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낯설다. 내겐 이미 숙주가 되어버린 '글'이란 세계를 의심한다는 것은. 병약하고 허황되게, 오만하고 미련하게 그간 나를 키워온 '글'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10대의 자존심을 으쓱이게 한 작은 함정, 20대의 열정을 지배한 종교이자 감옥, 30대의 허무를 사로잡은 향수, 여전한 절망. 그 시절 내가 동경했던 글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대체 무엇을 글에게서 바라고 멋대로 실망한 것일까.
과거의 난 글이 오직 나만의 재료와 기법으로 창작돼야 한다는 망상에 붙들려 있었다. 생경한 단어의 조합을 고심하고 설익은 단언을 서슴지 않았다. 본래적 존재를 위협하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증명하는 정체성의 NFT(대체 불가능 토큰). 그것이 글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경탄을 넘어 질투와 시기를 부르는 표현력과 사고력. 최소 둘 중 하나로 상대를 좌절시키는 글을 숭배했다. 그리고 나 또한 새로운 인지 영역을 안내하는 마법의 지도를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멈춰버린 조회수. 자의식의 과잉이 빚어낸 참사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나와의 거리두기에 실패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글을 다시 바라본다. 이것이 누군가와의 전투인지 대화인지 곱씹으며. 이토록 불가해한 내가 16개 족속 어딘가엔 속한다는 MBTI의 위로는 사실 책에서 먼저 배웠다. 보이지 않는 독자와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한 번쯤 멈출 법한 초라함과 어설픔, 뜻밖의 환희 같은 이입될 여지를 남겨야 한다. 쓰는 사람의 순간, 그보다 오래였던 읽는 사람의 감흥을 너무 쉽게 잊었다.
그러나 이 여지마저 오독되지 않기 위해 대다수 사람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사고의 정리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리스는 말했다. 말의 목적은 곧 듣는 사람이라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글의 고향은 말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과연 주관의 객관화라는 난제를 푸는 열쇠는 어디 있을까. '네 안의 박수꾼이 지쳐야 비로소 글이 생기를 띠기 시작한다'는 박동규 시인의 말을 되뇌어본다. 언제나 관람석 1열을 고수하며 요란하게 앵콜을 외쳐 뒷 좌석 모두를 가려버린 그 사람. 이제 그만 그를 끌어내려야 했다. 마침내 새하얀 밀실 같은 모니터 화면 너머 당신이 있었다.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을 떠올리다 하이틴 영화 '청바지 돌려 입기'가 생각났다. 체형이 다른 4명의 소녀들 모두에게 꼭 잘 맞는 미스테리한 청바지가 있었다. 언젠가 내 손에서 명징하게 직조된 하나의 물성을 띤 글이 헛헛한 독자를 감싸안는 온기가 되고, 저마다의 마음 크기에 꼭 맞는 공명을 일으키길. 그야말로 영화 같은 상상에 빠져본다.